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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 life

[오늘의 새활용] 내게 와 '나의 컵'이 되었다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8. 1. 6.


성질은 드럽지만, 결코 까다롭지는 않은 나란 인간.


'3초의 법칙'에 따라 바닥에 떨어진 3초 이내의 음식물도 후딱 집어먹고, 같은 방을 쓰는 '룸메'가 새벽 3시까지 불을 훤히 켜놓고 텔레비를 봐도 개운하게 잠만 잘 자드라. 신경이 무딘 덕에 ‘신경성 위염이 뭡니까?, 여행 가서 왜 똥을 못 쌉니까?’ 이렇게 살아온 나의 인생. 당연히 직장이든 집이든 ‘나의, 나만을 위한, 나에 의한’ 내 컵 따위는 없었다. 그날 그날 설거지통에서 집히는 데로 집어 쓴 컵이 하루 동안의 내 컵. 다음에는 또 다른 컵. 


이 컵도 그 중 하나였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게 와 ‘나의 컵’이 되었다. 



여성환경연대에서 일할 때 공동대표로 일하던 북센스 출판사의 ‘송주영’ 샘께서는 안 쓰시는 물건을 바리바리 싸들고 사무실에 전해주시고는 했다. 그날은 그야말로 지름신이 내린 것마냥 활동가들 ‘물건 득템’의 날이 됐다나. 외국 여행에서 샀을 법한 특이한 옷들과 신발, 출판업에서 나온 여러 분야의 책,  이제는 안 쓰게 된 미니 전기 오븐까지, 온갖 살림살이가 송주영 샘의 ‘푸대(?)’에서 나왔다. 


나는 송주영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북센스 출판사의 책을 통해 ‘고릴라가 핸드폰을 미워하는 이유’를 알았고, 그 책을 쓴 박경화 작가를 만났다. 지금은 나름 국내에서 유명해졌지만, 당시엔 알려지지 않았던 일본 비전력 공방의 ‘후지무라’ 선생님의 책을 내고 그를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한 것도 북센스 출판사였다. 그녀의 상암동 집에서 <<3만엔 비즈니스>>를 번역한 분과 모여 맛있는 밥을 먹기도 했고. 


내가 망원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그릇, 칼, 컵, 행주 등 부엌 살림을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예의 송주영 샘께서 집에 남는 식기를 선물로 주셨다. 그때 이 컵은 내게 왔다. 




아무 컵이나 집어 쓰던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온 누군가 이 컵에 차를 마시고 나서, 컵이 참 예쁘다는 말을 남겼다. 사람의 마음이 간사한 것이, 그때부터 이 컵이 반짝반짝 예뻐 보였다. 컵을 잘 씻지도 않고,어제 마시고 찻잔에 남아있는 커피를 오늘 또 마시고, 그런 주제라 예뻐 보이는 김에 아예 ‘내 컵’을 만들기로 했다. 


오호라. 그때부터 정말로 이 컵이 내게 특별해져 버렸다. 어떤 의미냐면, 우리 집이 쓰나미에 휩쓸려 떠내려갈 때 여러 개의 컵 중 오로지 너만을 신문지로 둘둘 말아서 가져갈 거라고. 


의미는 이렇게 피어난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니었던 일상의 사물은 의미를 부여받은 후 비로소 ‘정물’에서 벗어난다. 의미가 새겨진 물건은 일상을 풍부하게 하고, 그로서 순간순간의 삶이 소중해지는 게 아닐까. 마치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날마다 커피를 내리며 ‘코피 루왁’이라고 속삭이는 마법의 주문처럼. 


너의 이름을 부르듯, 나는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너를 그렸다. 그 순간 부엌 식탁에는 좋아하는 음악이 흐르고, 내 룸메는 부엌 옆 거실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일을 하고, 나는 ‘내 컵’이 된 너를 그리고. 충만하다고 밖에는 묘사할 단어가 없는 그런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