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질은 드럽지만, 결코 까다롭지는 않은 나란 인간.
'3초의 법칙'에 따라 바닥에 떨어진 3초 이내의 음식물도 후딱 집어먹고, 같은 방을 쓰는 '룸메'가 새벽 3시까지 불을 훤히 켜놓고 텔레비를 봐도 개운하게 잠만 잘 자드라. 신경이 무딘 덕에 ‘신경성 위염이 뭡니까?, 여행 가서 왜 똥을 못 쌉니까?’ 이렇게 살아온 나의 인생. 당연히 직장이든 집이든 ‘나의, 나만을 위한, 나에 의한’ 내 컵 따위는 없었다. 그날 그날 설거지통에서 집히는 데로 집어 쓴 컵이 하루 동안의 내 컵. 다음에는 또 다른 컵.
이 컵도 그 중 하나였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게 와 ‘나의 컵’이 되었다.
여성환경연대에서 일할 때 공동대표로 일하던 북센스 출판사의 ‘송주영’ 샘께서는 안 쓰시는 물건을 바리바리 싸들고 사무실에 전해주시고는 했다. 그날은 그야말로 지름신이 내린 것마냥 활동가들 ‘물건 득템’의 날이 됐다나. 외국 여행에서 샀을 법한 특이한 옷들과 신발, 출판업에서 나온 여러 분야의 책, 이제는 안 쓰게 된 미니 전기 오븐까지, 온갖 살림살이가 송주영 샘의 ‘푸대(?)’에서 나왔다.
나는 송주영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북센스 출판사의 책을 통해 ‘고릴라가 핸드폰을 미워하는 이유’를 알았고, 그 책을 쓴 박경화 작가를 만났다. 지금은 나름 국내에서 유명해졌지만, 당시엔 알려지지 않았던 일본 비전력 공방의 ‘후지무라’ 선생님의 책을 내고 그를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한 것도 북센스 출판사였다. 그녀의 상암동 집에서 <<3만엔 비즈니스>>를 번역한 분과 모여 맛있는 밥을 먹기도 했고.
내가 망원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그릇, 칼, 컵, 행주 등 부엌 살림을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예의 송주영 샘께서 집에 남는 식기를 선물로 주셨다. 그때 이 컵은 내게 왔다.
아무 컵이나 집어 쓰던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온 누군가 이 컵에 차를 마시고 나서, 컵이 참 예쁘다는 말을 남겼다. 사람의 마음이 간사한 것이, 그때부터 이 컵이 반짝반짝 예뻐 보였다. 컵을 잘 씻지도 않고,어제 마시고 찻잔에 남아있는 커피를 오늘 또 마시고, 그런 주제라 예뻐 보이는 김에 아예 ‘내 컵’을 만들기로 했다.
오호라. 그때부터 정말로 이 컵이 내게 특별해져 버렸다. 어떤 의미냐면, 우리 집이 쓰나미에 휩쓸려 떠내려갈 때 여러 개의 컵 중 오로지 너만을 신문지로 둘둘 말아서 가져갈 거라고.
의미는 이렇게 피어난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니었던 일상의 사물은 의미를 부여받은 후 비로소 ‘정물’에서 벗어난다. 의미가 새겨진 물건은 일상을 풍부하게 하고, 그로서 순간순간의 삶이 소중해지는 게 아닐까. 마치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날마다 커피를 내리며 ‘코피 루왁’이라고 속삭이는 마법의 주문처럼.
너의 이름을 부르듯, 나는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너를 그렸다. 그 순간 부엌 식탁에는 좋아하는 음악이 흐르고, 내 룸메는 부엌 옆 거실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일을 하고, 나는 ‘내 컵’이 된 너를 그리고. 충만하다고 밖에는 묘사할 단어가 없는 그런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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