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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 life

[제로웨이스트] 이 빠진 키보드, 시간이 약이다.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8. 1. 20.


미니얼리즘을 추구하고 플라스틱 제품은 되도록 구매하지 않고 싶지만, 키보드는 필수품이기도 하고 플라스틱 이외의 소재로 생산되지도 않는다. 요 근래 회의 서기나 글을 쓸 때  노트북이 아니라 늘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됐다. 가볍고 간편하다. 그러자면 휴대폰에 이어폰이 따라붙듯, 블루투스 키보드가 필요하다. 마음과는 달리 점점 더 많은 일인용 소형 가전이 필수품이 되어가는 현실.

갖고 싶은 것을 사기 전에 한 일주일을 흘려보낸다. 뭐 없어도 괜찮네, 라며 사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사그라드는 경우가 있고,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없어도 불편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구매 욕망이 산을 올랐다 내려오는 등산객처럼 마음의 등고선을 따라 들쑥날쑥하다. 실연에 대처하는 것처럼 지름신을 쫓는 효과적인 방법도 시간이다. 

사지 않고 버티며 직장 공용의 블루투스 키보드를 쓰곤 했다. 대부분 스마트폰에 키보드가 필요할 때는 외부 회의 내용을 기록하는 일 때문이었다. 그러다 점점 개인적으로도 노트북을 싸 들고 다니지 않게 되었다. 편집할 필요 없이 글만 긁적일 때는 스마트폰만 있으면 어디서나 글 쓰는 것이 가능했다. 이런 멋진 신세계 같으니라고. 여행 다닐 때 스마트폰으로 쉽게 글을 쓰는 방법을 알았다면, 여행의 응축된 시간을 많이 풀어썼을 텐데, 라고 생각했다. (걍 해 본 소리...)  

결국 키보드를 하나 장만했다. 직장의 블루투스 키보드는 들고 다니기 쉽게 반으로 접히는 폴더형이었는데, 직접 사용해보니 크기가 작아서 불편했다. 키가 다닥다닥 붙어있어 오타가 다닥다닥 나곤 해서, 내 손이 거인 손처럼 여겨졌다능. 들고 다니기 편하게 무게만 가볍다면 차라리 크기는 큰 것이 좋았다. 대개 소형 가전이 동력으로 건전지를 사용하는데, 쓰고 버리는 건전지 말고 스마트폰 충전기로 충전해 쓸 수 있는 기계면 더 좋았다.

그래서 들고 다니기에는 가볍지만 크기는 넓대대하고 충전식인 블루투스 키보드를 장만했다. 한동안 가열차게 썼는데, 이런 맙소사. 커버를 안 씌우고 마구잡이로 가방에 쑤셔 넣고 다닌, 순전히 내 부주의 탓에 키보드의 키 한 짝이 떨어져 나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ㅜㅠ 귀차니즘이 가져온 비극... 나의 키보드는 'ㅠ(b)'라는 이가 빠져부렀네. 



주변에서 소형 가전은 수리하는 것보다 새로 사는 것보다 훨씬 쉽다고 했다. 뭐 소형 가전뿐이랴. 지금은 버리고 새로 사는 것이 비용과 수고 면에서 월등히 나은, 이상한 세상이다. 그래도 이 플라스틱을 버리고 또 플라스틱 덩어리를 사야한다는 것이 영 찜찜해서 AS 센터에 연락을 했다. 고칠 수 없나요?수리비는 얼마나 되나요? 

결국 이런 답이 왔다. 나온지 오래 되지 않은 제품인데 벌써 단종이 되어 부품도 없고, 고치기도 수월하지 않단다. 아니 달나라에 사람을 보낸 지 어연 50년, 이제 태양계를 넘어서 오리온계를 항해하는 우주시대 아닙니꽈. 이거을 고칠 수가 없다뇨. ㅜㅠ 친절하게도 싼 값에 새 제품을 보내주신다는 제안이 왔다. 키보드 이 하나 빠진 것만으로 플라스틱을 통째로 내버리기 싫어서 그런 건데, 그런 '별난' 문법을 설명하자면 진상 고객이 되는 거다. 알았다, 고맙다, 필요하면 다시 연락하겠다고 답을 보냈다. 



참으로 수리하기 어려운 시기다. 버리고 새로 사는 것이 합리적인 세상이다. 좌절한 나는 다시 '시간'에 기댔다. 일주일 간 새 제품을 사지 않고 버티며, 이 빠진 키보드를 계속 써 봤다. 아니!!! (동공 지진!!!) 이렇게 한국어에 'ㅠ(b)'가 많이 쓰이지 않다니. 새로운 사실을 영접했다. ㅠㅠ 를 ㅜㅜ로만 쓰면 별로 불편하지 않구나. 내가 자주 쓰는 단어 중 '유해물질'은 독성물질로 바꿔 쓰면 된다. 영어 키보드는 어차피 별반 사용하지도 않아 b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이 키보드를 지금까지 애용하고 있다는  'happily ever after'의 해피엔딩. 

다만, 이후 커버도 없이 가방에 키보드 자판을 쑤셔넣는 무식한 짓은 저지르지 않는다. 또 이가 빠지면 이젠 답이 없거든요. 적당한 커버가 없길래 굴러다니는 파일에 꽂아서 휴대하고 있다. 이 역시 가볍고 부피도 얇고 나름 키보드를 보호해준다. 역시 시간이 약이다. 


 내 스마트폰의 반려물건, 블루투스 키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