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하는 여자들(sisters of the revolution)이라니!
제목만으로도 너는 콜 J
나는야 베트남 사파(Sapa)에서도 ‘Sisters Sapa’ 간판을 보자마자
가격 비교고 뭐고 업체 정보고 뭐고 바로 결제할 정도로 ‘시스터’ 중독자인 것을.
그 좋아하는 BL계에서도 SF나 판타지 장르는 안 읽는다만 너는 제목에 시스터와 혁명까지 들어있는데 내 어찌 건너뛰리.
그리하여 페미니즘 SF소설 선집인 <<혁명하는 여자들>>을 읽게 되었다.
그러고는 이 책을 통해 SF소설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어슐러 르 귄의 말처럼 ‘SF는 현실을 다시 곱씹어보는 일종의 사고실험’에 적합한 장르다! 이를 이 책의 번역자 신해경 씨는 “사회적 약자로서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꿈꾸는 여성들의 상상과 고민”이 SF 소설에 녹아 들고, 이런 이유로 “여성작가들에게서 훌륭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영화 <매드맥스>적 상상력 같은 것을 SF 소설에서 글로 푼다고 할까.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에서는 행성으로 변한 부인이 하늘을 날아 남편을 떠나는데, 그 배경에는 미국에 정착한 중산층 인도인 부부의 삶이 있다. “그는 혼비백산해서 아내를 쳐다보았다. 남편을 이름으로 부르다니!... 전통을 따르는 점잖은 여성이라면 절대 자기 남편을 이름으로 불러서는 안 되는 법이다.” (전자책 6쪽) 평생을 점잖게 자기 남편 이름조차 부르지 못한 부인은 어느 밤 동네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사리를 훌훌 벗어 던지고 ‘점잖지 못하게’ 하늘로 올라간다.
늑대소년 혹은 늑대소녀 이야기를 변형한 <늑대여자>의 경우 어떻게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어떻게 사회에 길들여지다가 어떻게 죽어가는지 늑대여자의 인생이 극적으로 펼쳐진다. 물론 늑대니까 자극적일 만큼 극적으로! “넌 운전을 배웠고, 손님 접대하는 법을 배웠다. 넌 다리 털을 밀고 눈썹을 뽑고 가혹한 화학약품으로 타고난 냄새를 가리는 법을 배웠고, 하이힐을 신고 걷는 법을 배웠다. 넌 화장품과 옷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법을 배웠고, 그 결과 타고난 미모보다도 한층 더 아름다워졌다. 넌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웠다.” (전자책 27쪽) 남편의 주변 사람들을 모두 홀릴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롭고 이국적이었던 늑대여자에게 인간의 한 해는 칠 년에 해당된다. 인간 사회에 처음 왔을 때 남자보다 훨씬 어렸던 그녀는 남자가 서른아홉이 되는 순간부터 가속도를 타고 급격하게 노화한다. 그녀의 나이는 서른 다섯에서 마흔둘, 마흔둘에서 마흔 아홉으로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로 늘어난다. 자기를 버린 아름다운 여자의 노화는 생명을 위협할 만큼 위험하다.
우주 개발과 방사선 사고 이후 버려진 행성에서 여자들만 살아남아 30세대 동안 단성 생식하는 세계가 펼쳐진다. 그 행성에 돌아온 남자들은 이렇게 묻는다. “사람들은 다 어디 있어요?” “나는 그가 말하는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남자’를 뜻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 남자들은 “우리 전부를 쳐다보면서 저녁 내내 변죽을 울리면서도 감히 물어보지 못했던 질문을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들 중 누가 남자 역할을 하는 거요?’”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 전자책 63쪽) 이거 어디에서 많이 듣던 소리인데? 레즈비언 커플을 볼 때 남자들이 묻고 싶은 느자구 없는 소리 아닌가. 주인공은 이렇게 반응한다. “그 질문. 마치 우리가 자신들의 실수를 고대로 답습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듯이!”
<무척추동물의 사랑과 성>에서는 어마어마한 방사능에 피폭된 아포칼립스의 세계에서 절멸해가는 인류의 한 여성 과학자가 캔 음료수 통과 건물의 빗물 홈통 등으로 금속 공룡을 만들고, ‘설국열차’의 마지막 생존자처럼 살아남은 두 마리의 공룡이 번식에 성공하는 모습이 나온다. 정작 그녀는 방사능에 노출되기 전에 그 공룡들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했다.
<공포>는 성별감별과 생식기술 발전으로 극단적으로 남아만이 선택된 결과 여자들이 거의 절멸된 세계를 그린다. “그 일은 그저 결국은 그렇게 되어 있었던 것마냥 일어났고, 사회의 가치들이 사회적 행동을 통제했다. 무엇보다 한 종이 모두 한 성별이 되기로 결심해서 안 될 일이 뭐 있겠는가? 특히 재생산이 성별과 분리될 수 있다면. 사람들은 남자들이 낫다고 믿어왔고,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해왔다.” (전자책 265쪽) 그 결과 모두에게 공포스러운 사회가 나타난다. 그런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다. 여자가 아니라 남자나 트렌스젠더라 할지라도.
역자 후기에 따르면 페미니즘 SF 소설 역시 페미니즘 운동의 궤도를 따라왔다. 1차 페미니즘 물결로 서프러제트(참정권) 운동이 일어났을 때, 젠더와 성역할, 가부장제에 짱돌을 던진 2차 페미니즘 물결이 찬란했을 때, 그리고 1990년대에 시작된 3차 페미니즘이 여성들 간의 인종적, 계급적, 문화적 차이와 연대, 다양한 성 정체성을 포함했을 때, 여성들의 SF 소설은 페미니즘 운동의 주제를 현실 너머로 반영했다.
동시에 SF 소설은 반동적인 여성혐오를 내뿜는 장이 되기도 했다. “냉혹하고 융통성 없는 여성들이 권력을 장악한 디스토피아, 여성들을 무지하고 철없는 사고뭉치로 그리는 작품들, 1955년 제정된 이래 1967년이 되도록 여성 수상자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여성경시 풍조가 심했던 휴고상, 2015년 휴고상 투표에서 여성작가들이 휴고상을 오염시키는 것을 막자는 조직적인 운동” (역자후기, 전자책 303쪽) 등이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페미니즘 운동이 그렇듯, 페미니즘 SF 소설에서도 싸우지 않는 한 공짜는 없다. 여성작가들은 아랑곳없이 작품을 내놓고 여기저기서 논쟁을 벌이고, 작가이자 편집자로서 후배 작가들을 키워내며 서로 격려해오며, 스스로 상을 제정하는 등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 결과 “아직도 저항은 있지만, 적어도 지금의 SF 소설은 여성 인물을 고민 없이 얄팍하게 묘사했을 때 호의적이지 않은 평을 감수해야 한다.” (전자책 303쪽)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더 많은 싸움이, 더 많은 논쟁이, 더 많은 수다와 고백과 이야기가, 더 많은 위로와 북돋움과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이 책은 그 사실을 복기하게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dit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 장소, 환대가 가진 두꺼운 의미들 (0) | 2016.12.25 |
---|---|
아름다움의 구원, 혹은 '아름다움'의 폐기 (0) | 2016.12.08 |
[페미니즘]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 (2) | 2016.11.24 |
[페미니즘] 아마도 올해의 가장 명랑한 페미니즘 이야기 (0) | 2016.11.18 |
가만가만 마음에 묵혀두고 싶은 삶, '가만한 당신' (0) | 2016.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