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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장소, 환대가 가진 두꺼운 의미들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6. 12. 25.





이 책을 읽으며 알던 사실을 다시금 곱씹었다. 내가 왜 인류학을 공부하다 관두었는지 말이다. 논문 짜집기는 어떻게 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두껍게 생각할 깜냥이 안 되는 것을 깨닫고 홀로 학계에 이별을 고했다는 거.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이런 연구자가, 이런 책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진작에 읽고 싶었지만 전자 책이 안 나와 있어서 한국에 돌아와서야 종이 책으로 읽을 수 있었다. 흠, 역시 ‘두꺼운’ 인문 및 사회과학 서적은 전자 책으로 잘 안 나오고 잘 안 팔린단 말이지. (내 책이 안 팔리고 전자 책으로 안 나온 이유도 그거야! -_-)


각설하고, 좋은 책이다.


타인에게 있을 곳(장소)를 내어주는 환대의 의미를 촘촘하게 생각해 볼 여지를 던진다. 인간은 생물학적 사실의 문제지만 인간은 타자들이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 것, 즉 사회적 성원권이 있어야 사람이 된다. 낸시 프레이저가 재분배와 동시에 중요하다고 강조한 인정의 문제는 바로 성원권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인도의 불가촉 천민 달리트, 태아, 노예, 군인, 수감인, 전염병자, 동성애자는 성원권의 밖에 서 있는 인간들이다.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고 성원권의 범주가 얼마나 넓어지는가에 따라 이들은 인간에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생물학적 인간의 선에서 멈추기도 한다.


성원권을 갖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를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 사람과 장소를 근원적으로 연관된 개념으로 본다는 점에서 아렌트는 장소의 박탈과 법적 인격의 박탈을 연결시킨다. 하지만 아렌트의 관심이 주로 정치적, 법적 문제에 맞추어져 있다면, 이 책은 공동체와 주체를 구성하는 상징적이고 의례적인 층위로 시야를 확장한다. 사람은 법적 주체일 뿐 아니라, 일상의 의례를 통해 재생산되는 성스러운 대상이기도 하다.” 26쪽

          

그에게 일상의 의례를 행해지고 그의 자리/장소가 마련되는, 타인의 환대를 통해서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난다. 환대는 시혜를 베풀거나 증여하거나 교환하는 행위와 다르다. 타인들 속에서 당신의 존재를 놓을 자리가 마련되는, 존재론적 제스처다. 환대 없는 재분배는 가능할지 모르지만(시혜적 복지), 재분배 없는 환대는 불가능하다. 


“환대란 재분배를 포함한다. … 사람을 연기하려면 최소한의 무대장치와 소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93쪽) 즉 사람을 연기할 수 있는 실질적인 자원을 내어주지 않는 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잔혹함은 니들 모두 권리를 가지고 있는 개인들이다, 자유롭게 살아라, 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하면서 결코 자원을 재분배하지 않는다는 점을 든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환대란 힘을 주는 것이며, 받는 사람을 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197쪽


그렇다면 환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정체성을 괄호에 넣은’ 무조건적인 환대가 가능한가. 네가 무엇이든, 어디에 있든, 그러니까 살인자든, 강간범이든, 거짓말쟁이든, 감옥에 있든, 아니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내 기준으로는 영 꺼려지는 범주의 인간들-달리트든, 동성애자든, 여성주의자든-도 환대할 수 있는가. 어떻게? 김현경은 흥미로운 답변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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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공동체에 대한 환상은 ‘개인이냐 공동체냐’라는 잘못된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 개인과 공동체는 결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며, 공동체 정신을 추구하는 것과 사생활의 자유를 갖는 것 사이에는 본디 아무 모순도 없다. 개인에게 자리/장소를 마련해주고 그의 영토에 울타리를 둘러주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역할인 까닭이다. 뒤르켐이 지적했듯이, 공공성이 강화될수록 사생활의 자유는 오히려 커진다.” 203쪽


바로 공공성을 강화하고 공동체를 구축함으로써 우리는 이런 양분적인 질문을 비껴갈 수 있다. 공유지의 비극을 반박한 오스트롬의 이론처럼 공유지에 대한 공동체의 권한이 확실하고 성원들이 서로를 알고 신뢰하며 공동체 규약이 제대로 작동할 때 모두에게 개방된 공유지는 오랫동안 지속가능하게 유지, 보존된다. 그러므로 “환대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공공성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환대는 공공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아동학대방지법을 만드는 일, 거리를 떠도는 청소년들을 위해 쉼터를 마련하는 일, 집 없는 사람에게 주거수당을 주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에게 실업수당을 주는 일은 모두 환대의 다양한 형식이다.” 204쪽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부분 두 가지.


“노예에게 온전한 이름이 없다는 것은 그가 태생적으로 소외된 존재임을 알린다. 그는 출생에서 기인하는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데, 그러한 주장을 들어주고 인정해줄 친족 집단이 없기 때문이다. 올랜도 패터슨은 노예의 신분이 자동적으로 세습된다는 통념을 비판하면서, 채무로 인해 노예로 전락한 자가 제 삼자-친족-에게 자기 아이를 맡길 수 있으면, 그 아이는 자유인으로 남게 된다고 지적한다. … 어떤 사람으로부터 사람의 지위를 박탈하는 일은 법의 제정과 집행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 이전에, 그가 어떤 일을 당하건 그를 위해서 나서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도록, 그를 둘러싼 사회적 연대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 37쪽


아, 이런 분석 아름답지 않은가. 나는 핏줄에 기반한 가족과 친족의 연대가 사라지고 있는 사회에서 생판 타인들끼리 서로를 위해 나서주는 모습을 상상했다. 특히 성 소수자처럼 가족이나 친족 관계를 박탈당한 (대부분 커밍아웃하면 그런 꼴 당하지 않겠수 -_-) 소수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들어주고 인정해주고 자리를 내어줄 공동체, 즉 제 2의 친족 집단이 정말 중요한 문제가 된다. 강자나 자원이 있는 사람들과 달리 약자에게 연대가 넘나 중요한 이유는 비로소 연대를 통해 성원권의 틈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떤 친족 집단을 가지고 있을까, 되새김질해본다. 


책에는 여자의 ‘자리’에 대한 탁월하고도 두꺼운 분석도 많이 나온다. 페미니스트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그 중에서 가장 속 씨헌한 구절 공유! 왜 어떤 페미니스트 티셔츠에 자랑스럽게 ‘I’m Bitch”가 써져 있는지 지적으로, 인류학적으로 증명하는 아래 문구.   


“오염의 메타포는 그것이 겨냥하는 대상이 지배계급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음을 함의한다. … 그 말은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는 동시에, 그러한 부정이 굳이 필요했음을 인정함으로써 그의 주체성을 역설적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더러운 년’이라는 욕을 들어도 전혀 위축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런 말을 듣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