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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6. 11. 24.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 어떤 애도와 싸움의 기록  

(아래 페이지는 이북 Ebook)

경향신문 사회부 사건팀, 나무연필 펴냄 

 

몇 개월 전에 일어났던 일을 추모의 포스트잇을 기록한 책을 읽으며, 복기한다.

잊으면 안 되는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슬픈 세상이다.


추모와 애도와 분노와 결심과 미안함이 뒤섞여 있는 말들 사이에서, 나도 다시 슬퍼하고 미안해하고 기억하고, 무엇보다도 마음을 뾰족하게 벼렸다. 여성이고 약자라는 이유로 화장실에서 살해당하지 않는 세상, 원하는 누구라도 새벽녘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지 하는 마음.


마치 오프라인 판 트윗처럼 포스트잇에 짧게 담긴 말들은 군더더기를 쳐낸 마음의 응어리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많은 기사와 칼럼과 성명서들의 핵심이 입말체로 속삭이고 있었다. 대부분은 분석이나 주장을 담은 것이 아니라 슬퍼하고 분노하고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주장이 객관적이라면 요구는 자기 문제로 여길 때에 나타나는 주관적인 반응이다. 여성들이 이미 잘 알고 있듯 강남역 살인사건은 그녀의 일이 아니라 여성 모두의 일이었던 거다.




먼저 화장실을 거쳐간 6명의 남자들은 모두 무사했던 반면 처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간 여성은 살해를 당했다. 언론은 신학도를 꿈꾸었다는 가해자의 꿈을 신파적으로 보도했지만 피해자의 꿈은 다루지 않았다.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가해자에게 감정이입 해서 기사를 읽는다. 살인마는 그 동안 여성들이 무시해서 그랬다는데, 그게 아니라 (발톱의 때처럼 여겼던 그깟) 여성들한테도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드니까 참을 수가 없었을 테지. 그런데도 여성혐오 사건이라는 목소리는 마치 그렇게 주장한 사람들이 가해자라도 되는 양 비판과 비난을 뒤집어썼다. 이보다 열광적으로 남의 일에 반대하는 무리는 북치고 장구치고 발레하며 동성애 반대를 외쳤던 광신 기독교 집단밖에 없을 거다. 그들은 강남역 사건 현장에 직접 왕림하사 추모하는 여성들의 마음에 공포를 심어주었다. 자유의 반대말은 부자유나 억압이 아니라 공포다.


그 동안 강남역 부근 화장실에서 몰카만 걱정했는데 이제 그 이상이고 널 위한 포스트잇 하나 붙이는데도 카메라를 걱정하는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미안해.” 131


추모할 때조차 몰카와 테러가 두려워 마스크를 써야 하는 한국 여자’” 192


이걸 읽는 당신도, 오늘 조심히 들어가세요.” 161


방금 지나간 남자분, “사람 하나 죽은 걸로 왜 지랄이냐고요?” 당신은 남자라서 살았으니까.” 289

 

추모하는 자들은 공포를 느끼는 자신을 미안해한다. 그런 것들에 완강히 싸우지 못했기에 네가 죽은 거니까.

그리고 싸우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다.

 

어제 추모 기사 댓글에서 새벽 1시까지 술 마시다 죽은 것이 그렇게 애통하냐는 댓글이 베플이었습니다. 그냥 보고 있지 않을께요!” 308


““조심해가 아니라 하지마가 맞지 않을까?” 260


당신이 죽인 것은 한 사람이지만 당신이 망가뜨린 것은 누군가들의 삶이다. 부디 쓴 벌을 받기를.” 222


오빠가 지켜주는 사회 필요 없고요. 물론 오빠도 필요 없음.” 161


우리를 잠재적 가해자로 여기지 말라는 일부 남성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간결하게 을 날린다. 


오해 받아서 기분 나쁘세요? 저는 죽을까 봐 두렵습니다.” 192


여성들이 혐오를 멈추고 여성을 약자로 인색해 저지르는 모든 범죄를 멈춰달라 말할 때 남성들은 자신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지 말라며 기분 나빠하고 있다.” 161


그런 트윗을 본 적이 있다. 남자가 전부 그런 건 아니니 걱정 말라고. 그럼 지뢰밭을 걸어가봐라. 전부 지뢰가 있는 건 아니니까. 안심해라.” 307

 

여러 명의 목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분출하고 이를 기록하기 위해 가감 없이 채록했기 때문에 우리 시대의 한계도 보인다.


언니가 미안해

반드시 사형제도 부활

꽃다운 청춘이지만, 여성이라고 살해당했습니다.”

다음 생은 언니랑 같이 남자로 태어나자


지금과 같은 여남의 권력구조와 약자를 혐오하는 분위기에서 강자인 남자로 태어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성별 차이가 권력과 차별의 근거가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는 여러 차례 다른 포스트잇들에 나온 여자든, 남자든 그 이유로 차별 받거나 살해당해서는 안 된다는 맥락과 통한다.


그리고 사형제도. 사형제 부활 요구가 포스트잇에서 반복되고 있다. 나도 이런 살인마와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하다만, 사형제가 혐오범죄를 예방하는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지, 가해자를 죽이는 처벌이 정의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음 침공은 어디>에서 몇 년 전 노르웨이 청소년 캠프 무차별 학살 사건에서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여전히 사형제도에 반대한다고 인터뷰한 장면이 생각난다. 그 장면은 너무 한다 싶을 만큼 인간적인 노르웨이의 감옥과 교정제도를 보여주는 부분에서 나왔다. 사형을 통해 범죄자를 단죄하고픈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아들을 잃고도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한 번 들어보면 좋겠다. 화면에 비친 그는 너무도 고통스럽고 슬픈, 그리고 숭고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의 가부장제, 연령주의, 가족주의에 맞서 싸우며, 개개인이 평등한 삶, 자기 자신으로서 차별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사회를 꿈꿔왔다. 그 시도 중 하나가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 별칭을 부르며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나이 따위는 궁금하지 않다, 나는 너를 내 눈 앞의 존재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하여 스무 살 초반부터 여성주의자들에 둘러싸여 지낸 나는 띠 동갑을 더 먹었든, 몇 살이 더 어리든, 서로 휴지, 목토, 오정, 달순, 기묘같은 별칭으로 부르며 존댓말을 할지 반말을 할지 서로 정했다. 나이와 지위를 모르면 사회적 서열을 정하지 못해 대화가 힘든 구조에서 벗어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근 이십 년 동안 서로의 안부를 돌봐주는 사이다. 존대는 안 하지만 나는 갈수록 그녀들이 존경스럽다. 그래서인지 추모의 글을 볼 때 꽃다운 나이’, ‘언니’, ‘동생등의 단어가 낯설게 다가왔다. 누구의 잘못이라는 것도 아니고, ‘정치적 올바름을 따지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가 넘어설 가부장제에 이런 것도 있다는 것, 여성혐오를 너머 평등한 사회를 꿈꿀 때 우리가 가진 한계들을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쳤던 두 가지 포스트잇을 공유한다.


마치 모든 한국 여자를 위한 하나의 묘지 같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61


늦은 새벽 혼자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새벽에 혼자 걷는 것이 두렵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그것이 큰 특권임을 너무 늦게 알아서 정말 미안합니다.” 131


늦은 새벽에 혼자 걷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을 읽으며, 이슬람 페미니즘의 기틀을 닦은 파테마 메르니시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하렘에 갇혀 평생 남자 없이 집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어머니가 탄식처럼 내뱉었던 물음을 기억한다. 이른 새벽 인적 없는 거리를 걸어볼 수만 있다면그 무렵 도시의 색깔은 푸름스름하겠지? 아니면 노을 질 때처럼 불그레할까?” (<<가만한 당신>>에서 발췌) 우리는 이런 하렘사회에서 얼마나 멀리 와 있는가.


Ebook은 무료 배포고, 종이책의 인세는 기부된다. 

기획과 편집을 맡은 경향신문 사회부 사건팀과 나무연필 출판사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