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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가만 마음에 묵혀두고 싶은 삶, '가만한 당신'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6. 10. 3.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관장 이정모 선생께서 얼마 전 칼럼에 매주 토요일을 기다린다고 쓰셨다. 토요일마다 한겨레 신문에 연재되는 여성학자 정희진 님의 글과 한국일보 최윤필 기자의 가만한 당신 시리즈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 두 분의 글과 황현산, 정혜윤, 박선영 님 그리고 이정모 님의 글을 기다린다. 그런 글들을 읽을 때면 활자를 아는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축복받은 일마냥 여겨진다. 이른 아침에 산책한 마음처럼, 마음이 가만가만해진다. (이 책이 나온 출판사가 바로 ‘마음산책’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yes24.com/24/goods/29188459



가만한 당신 시리즈를 엮은 책 <<가만한 당신>>이 나왔다. 모르고 지나쳤을, 세상의 ‘가만한 당신’들을 알게 해 준 이 책에, 그리고 필자께 감사 드린다. 이 책에 오롯이 담긴 가만한 당신들의 삶이 내 마음을 쳤다. 덕분에 ‘이성의 비관주의, 삶의 낙관주의’ 같은 기운을 마음에 품을 수 있었다. 쓰리고 시린 상처 같은 현실에서 더 나은 세상, 그리고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가만가만 고투한 인간의 엑기스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렇게 멋진 인간들이 위인전집에 수록되지 않을 만큼 인간 세상이 넓다니 ‘인간이라서 다행이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책에 실린 ‘가만한 당신’들 누구도 빼기 힘들고, 그들의 삶을 얽은 최윤필 기자의 문장도 아름다워서 내용을 요약하기가 쉽지 않다. 그저 연필로 꾹꾹 눌러 써 내려가듯 마음으로 꾹꾹 눌러 읽으면 좋겠다. 특히 사 보면 좋겠다. (단순한 삶 신봉자라서 물건 소유하라는 말은 잘 안 하지만!) 저자 인세 전액이 해방촌 길고양이 기금으로 사용된다. (다정다정 :)


이 책에 실린 사람들은 “차별과 억압과 무지와 위선에 맞서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가치와 권리를 쟁취하고자 우리 대신 우리보다 앞서 싸워준 이들이라고 하겠다. 글을 깊이 읽은 내 친구는 그들을 “생을 거의 완전연소한” 이들이라고 표현했다.”(7쪽) 부록으로 실린 저자 인터뷰에 따르면 “우리의 상식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전하게 상식으로 자리 잡지 못한 근대적 가치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면서 누리는 것들을 앞서 만들어내려고 노력한 사람들”이다. “차별, 인권, 평등, 자유, 뭐 이런 주제들. 뻔할 수 있지만 그걸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것과 직접 몸으로 살아내는 것은 다르잖아요.”(315쪽) 그러니 그들의 삶을 읽으며 여러 번 세상에 대한 분노와 인간에 대한 회의와 동시에 그들에 대한 감사와 감격과 존경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단연코 올해 읽은 책 중 이렇게 가만가만 마음을 두드리는 책은 없었다. 


그들이 바꾸려고 한 현실은 이렇다.  


“죽이려면 총으로 죽여달라는 남편을 조롱하며 그들은 ‘(칼로) 조각조각 내 죽여주겠다’라고 했다.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고) 남편의 토막 난 시신을 내게 한데 모으게 한 뒤 그 위에 나를 눕혔다. … 열두 명째에 이를 무렵 옆방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열다섯 살, 열세 살 딸과 내 여동생의 목소리였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14쪽) 전자제품 부품의 핵심 원료로 사용되는 ‘콜탄’, <<고릴라는 핸드폰을 미워해>>에서 고릴라를 죽이는 원인으로 뽑혔던 바로 그 콜탄이 아프리카 세계대전으로 불리는 공고내전을 불렀다. 무역상인 남편이 가져온 물건을 가게에서 떼어 팔던 중산층 여성 레베카 마시카 카추바의 인생은 그렇게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레베카는 성산동에 위치한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에서 만나볼 수 있으며, 그녀는 한국 ‘위안부’들이 전시 여성 인권을 위해 조성한 ‘나비기금’의 1호 수혜자이다. 


혈우병을 앓던 홀브룩 콜트는 자라서 혈우병을 연구하고 치료하는 의사가 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어릴 적 여호와의증인 신자들의 잔인한 폭력을 떠올리며 “(단지 수혈을 한다는 이유 만으로) 생존에 필요한 처방을 받는 사람을 향한, 그토록 지독한 편견과 비이성적이고도 집요한 적의를 그 뒤로도 경험한 적이 없다.”라고 썼다. (22쪽) 


동성애자 쾨스니는 난소암 통원 치료를 받던 중 유방에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근처 병원이 아니라 40여분을 더 달려 인디애나 주 경계를 넘어 일리노이 주 병원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두려워서 그랬다”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가 두려워한 건 병과 죽음보다 법과 제도의 억압이었다.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는 인디애나 주법에 따르면 13년 반려자 에이미 샌들러도 완벽한 타인일 뿐이어서, 가족에게만 면회가 허용되는 투병 과정이 더 고독하고 절망적이리라 그는 두려워했다.”(62쪽) 


의미 없는 연명 치료를 거부하며 스스로인 채로 죽기 위해 싸워야 하는 현실도 있다. “지금 우리에겐 두 갈래 시스템이 있다. 하나는 (존엄사를 합법화한) 스위스 디그니타스를 이용할 만한 돈과 조력을 동원할 수 있는 이들을 위한 시스템,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시스템이다.” (198쪽) 그리하여 이들을 돕는 조력자들이 생겨났지만 존엄사가 합법화되지 않은 나라에서 조력자들은 자살 방조죄로 영국의 경우 최대 14년까지 구형될 수 있다. “그는 몸이 마비돼가는 상황에도 혼자 자신의 삶을 책임질 만큼 독립적인 여성이었지만 (죽기 위한 준비까지) 혼자 해내야 하는 현실을 끔찍하게 여겼다.” (298쪽) 그리하여 스스로 인터넷에서 헬륨키트를 사서 목숨을 끊은 그녀를 도운 혐의로 존엄사 활동가 엘리자베스 리비 윌슨은 연행되고 만다. 


1960년대 인종차별 반대 캠페인 ‘버스를 타자’에 나선 흑인과 백인 활동가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던 현실, “내 삶의 문제는 키가 자라지 않고 내 뼈가 툭하면 부러지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내가 가고 싶은데 갈 수 없게 만들어진 무수히 많은 공간들에서 비롯된 것들”(33쪽)로 채워진 비장애인만을 위한 세상, 어머니에게 강박적으로 모성을 강요하는 현실 등 벗어나고 싶은 세상사가 잔망스럽게 펼쳐진다.  


그리고 그에 맞서 자신의 생을 거의 ‘완전연소한’ 이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콩고의 레베카 마시카 카추바는 전시에 강간당하고 버려진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는 경청의 집(Listening house)를 설립하고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돌본다. 여성 생존자의 한 명으로서, 같은 일을 겪은 6,000명의 여성들을 감싸 안았다. 추모사에 나온 말처럼 “그 어떤 야만도 인간의 존엄과 평화를 향한 인류의 열망을 이길 수 없음을 그는 내게, 이 세계에 보여주었다.”(18쪽) 


장애인이면서 글 쓰고 방송하고 뜨개질하는 사람이 아니라, 글 쓰고 방송하고 뜨개질을 좋아하면서 장애도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정체성화한 스텔라 영은 “음악에 영혼을 맡기고 춤으로 근심 따위를 털어내는 그 공간에서조차 그들, 비장애인들은 나의 존재를 교훈적 타자로 대상화한다. 장애인의 몸은 그 자체로써 정치적이기 때문에, 나의 춤은 정치적 발언이 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춤을 추고플 땐 출 것”(34쪽)이라며 클럽에서 춤춘다. 그녀는 과자를 먹다가 사래가 들리면 쇄골이 부러지기도 하는 불완전골형성증이란 희귀 유전병을 갖고 태어났다. 


쾨스니는 인디애나 주 연방지방법원에 자신들을 법적 부부로 인정해달라며 소송을 제기해 6개월 만에 인디애나 주의 동성 커플의 혼인확인서 발급이 시작된다. 미국의 모든 주를 통틀어 법정투쟁 최단 기록으로 인디애나 주의 동성혼 합법화를 이끈 그녀, 그리고 이후 동성결혼이 미국 전역에서 합법화되는 물꼬를 튼 그녀가 삶을 마감한 나이는 38세였다. 미국의 동성애자들, 그리고 전세계의 동성애자들이 그녀의 삶에 빚진 채 살아가게 될 거였다. 


특히 이 책에서 많이 다룬 주제가 페미니즘과 존엄사다. 


“조부모 노릇은 부모 노릇과 달리 순수한 기쁨이다. 하루이틀 뒤 조금도 미안한 마음도 없이 짐 싸서 집에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43쪽)라고 말한 바버라 아몬드, “나를 오르가슴을 경험한 여성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니고 살아왔다. 성적으로 억압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억압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억압당하지 않는 여성은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다.”(115쪽)라고 말한 델 윌리엄스, “나 같은 ‘생존자’는 상담을 받으라는 말을 늘 듣고 한다. 하지만 내겐 글쓰기와 페미니즘이 최선의 치료법이었다.”(132쪽)라고 말한 데니즈 마셜, 이슬람 페미니즘의 터전을 닦은 파테마 메르니시 등 어록을 줄줄이 뱉어내는 멋진 여성들이 나래비로 등장한다. 읽는 족족 얼마나 행복했던지!


그리고 “죽음 이후는 없다고 생각한다. 만일 내가 죽게 된다면 내 방식대로 죽고 싶다.”고 말한 딘 포터처럼 의료화되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인 채로 죽기 위해 죽음으로서 싸웠던 수많은 존엄사 투쟁자들을 만나볼 수 있다. 나 역시 언니의 죽음을 바라본 이후 존엄사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알게 되었던 바, 이들에게 가없이 감사한 마음이 든다. 재를 잉크에 섞어 책 인쇄에 쓰게 한 마블코믹스 편집자 마크 그루엔발트와 “내 집이 이웃에게 늘 열려 있기를 바란다”라며 자신의 뼈를 녹여 대문 버팀쇠로 만들게 한 전 콜로라도 민주당 하원의원 퍼트리샤 슈뢰더(148쪽)만큼은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은 자기 방식대로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외에 세계에서 가장 광활한 사유지 야생공원인 푸말린공원, 국립공원이 된 아르헨티나의 몬테로온공원, 칠레 파타고니아의 코르코바도공원, 그리고 아르헨티나 최대의 야생습지공원 에스테로스 델 이베라의 땅을 사들여 인간으로부터 지켜낸 노스페이스 창업자 더글러스 톰킨스의 삶(이제 국민 체육복처럼 입고 댕겼던 노스페이스를 비웃지 않을 거임), 스페인 내전의 참전 용사에서 여름에는 과일을 따고 가을, 겨울에는 가지 치는 농업 노동자로 살면서 여러 진보 NGO의 ‘이름 없는’ 활동가로서 반전, 반핵 운동, 미 CIA의 중앙아메리카 개입 반대, 아프리카 나미비아 민주 선거 참관 등에 참여했던 시민적 교양의 끝판왕 델머 버그, 아우슈비츠 생존자로서 나치즘과 시오니즘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행동했던 하요 마이어 등 우리가 가만가만 마음 속에 묵혀두어야 할 삶들이 책에 실려 있다.

 

그저 직접 읽어보고 느끼란 말 외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좋은 책, 그리고 좋은 삶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