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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조사관, 한국적 추리소설에 대한 기대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6. 9. 21.

송시우 작가가 있어서 다행이야.

6개월 간의 여행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행 물건 중 하나는 크레마 전자책 리더기. 이거 이거 어디서 잃어버리면 외국에서는 살 수도 없기에 휴대폰보다 더 중하다. 그런데 국내 전자책 리더기는 아마존 킨들만큼 인기를 누리지 못한 까닭에 읽고 싶은 전자책들이 많이 나와있지 않다. (사회과학, 인문분야 책들은 잘 나갈 경우에만 전자책이 나온다. ㅠ.ㅠ 그나마 신간은 전자책을 출간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지만.) 그래서 불혹의 나이에 청소년 때도 안 읽었던 세계문학전집을 다운받아서 읽고 있는데 교양이 없다 보니 아주 수능 언어영역 지문 읽는 짝으로 책을 읽게 됐다. 톨스토이, 불가꼬프, 도스또예프스키 등 러시아 문학부터 시작했는데, 하루 50장 할당제를 적용해 숙제하듯이 읽어나가고 있다. (죄송해요, 문학의 거장님들, 어쩌겠수.) 교과서 컨텐츠만 들어있는 전자책 리더기를 멀리하고 게임기처럼 재미난 휴대폰 페북으로만 쏠리는 마음을 돌리고자 다운받은 책이 송시우 작가의 <<달리는 조사관>>. 오랜만에 책장 넘기는 지도 모른 채 책장을 술술 넘기면서 생각했다. 송시우 작가가 있어서 다행이야, 책 읽는 온전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잖아.



카페 탁자 위에 전자책 리더기를 놓고 손에는 휴대폰을 ㅋㅋ

세계문학전집을 읽는 동안은 이랬드랬다.


일본에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장 '미미' 여사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송시우 작가가 있다. 이제 두 권의 책을 냈을 뿐이지만, 아니 그래서 더욱 기대된다. 첫번째 책부터 예사롭지 않았고 두번째 책도 뿌듯하다. 명탐정이나 비범한 수사관이라고는 도통 나오지 않는, 아토피에 시달리며 근무시간에 '스댕을 사랑하는 사람들' 인터넷 카페에 들락나락하고, 폭력배의 인권 진정 사건을 다루다가 피 공포증 '헤파토포비아' 탓에 기절하고, 인권위 조사관인데도 '개저씨' 마초의 습성대로 여자들 무시하면서 일하고, 같잖은 정의감을 내세우지만 실은 자기 잘난 척을 하고 싶어서 안달난 인권위 조사관들이 주인공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결점이 추리소설의 전개를 감질나게 풀어가는 방편이 되고 한국사회의 현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도드라지게 만든다. 이게 소설일까, 아님 '이것은 실화다'와 같은 재현 시나리오일까, 하고 헷갈릴 정도. 무엇보다 막장 재현 방송처럼 흥미진진하다. 책을 펼친 후 관광이고 여행이고 뭐고 숙소에 드러누워 끝까지 읽고야 말았다능. 






현존하는 인권위를 배경으로 활동하는 평범한 조사관들의 모습이 현실감을 보강하지만, 가장 큰 요인은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지금, 여기'의 이슈들을 소설의 밑감으로 적절히 배치한 작가의 센스 때문이다. 책에 수록된 박현주 씨의 작품 해설에 따르면 "오락으로서의 퍼즐이 부각되기는 했어도 소설은 실화의 사건들을 비틀어 묘사하며 현실감을 부여한다. ... <승냥이의 딜레마>에서 사용된 공동정범이라는 소재에서는 16년 만에 재점화된 이태원 살인사건이 연상되기도 하고, 2000년 익산에서 택시 기사를 살해한 죄로 체포되어서 억울하게 10년 동안 갇혀 있다 출소된 '10대 배달부' 최모군 사건과 유사한 점도 엿보인다. ... 그외 소재로 쓰인 민간인 사찰, 노조 내 성희롱, 이별 폭력, 강압 진압 논란 등은 모두 뉴스에서 만났던 사건들이었다. <<달리는 조사관>>은 21세기 초의 한국 범죄사의 간략한 스크랩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책 318쪽) 


예를 들어 이런 사건들. "명예훼손은 형법상 반의사불법죄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명예훼손의 정도가 아무리 커도 처벌할 수 없다. 검찰은 강윤오의 ‘쥐잡기 게임’을 대통령 명예훼손죄로 수사하면서 대통령에게 강윤오의 처벌을 원하는지 여부를 물어봤을까?" (전자책 2쪽) 대통령 명예훼손죄로 걸려 민간인 사찰을 당하다가 자살한 강윤오가 만든 게임의 제목이 바로 '쥐잡기'다. 벽에 '쥐박이' 그려넣었다고 기소당했던 한국적 상황이 여념 없이 들어있다. 그리고 경찰의 테이저 건 오발로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을 통해 쌍용차 노조 진압 때 노조원 얼굴에 쏘기도 했던 테이저 건이 얼마나 위험한 무기인지도 넌지시 암시한다. 


그렇다고 모든 진실이 진보의 선을 따라 명쾌하고 깔끔하게 갈리지도 않는다. 조사관 윤서는 가난하고 못 배우고 모자란 사람들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돈도 받지 않고 몸 바쳐 일하는 변호사가 '날조'한 사건을 놓고 "진실이라는 게 생각만큼 단순하지가 않죠?" (전자책 279쪽)라고 말한다. 그녀가 그 사건의 당사자인 순구에게 건넨 말은 "변호사님께 순구 씨의 선택을 말해요. 선택하고, 선택한 대로 하세요."이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모자란 당사자에게서 진실을 찾고 그 진실을 감당할 책임을 요구한다. 작가는 마음이 동하고 쉬운 길인 동정과 시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는 일의 지난한 경로를 그렇게 제시한다. 송시우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인간의 동등한 권리라는 것은 유니콘과 같아서, 세속의 인간이 부단히 다투어 추구해야 하는 이상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다툼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가 충돌하기 마련이고, 여기서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으며 범죄 사건과도 연관 지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라고 인권위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이유를 들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흑백의 단순한 논리로 따질 수 없는, 세속의 인간이 부단히 다투어 추구해야 하는 인간의 동등한 권리를 세심하고 미스터리하게 다룬다.              


사족! 

여자 조사관 윤서 캐릭터 완전 좋았다! 남자 조사관들은 인간적으로 찌질하고 못난 면이 솔솔 드러나는 반면 여자 조사관들은 아토피와 헤파토포비아라는 본인이 어찌할 수 없는 결점을 안고 있을지언정 조사관으로서 유능하고 착실하고 자성할 줄 아는, 매력적인 인간으로 느껴진다. "그냥 같이 밤새 얘기하실래요? 뭐, 출장비도 아낄 겸"이라며 지방 출장차 머무는 여관에서 여자 상사 조사관을 성적으로 내려 찍으려는 남자 조사관에게 평소 소심하고 조용하던 윤서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뭐라고 했니, 너? 방금 하신 말씀이 직장 내 성희롱인 거 아시죠? 한번 말한 거 두 번 못할 이유가 없죠? 비겁하게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잡아뗄 참이야? 어? 해봐. 한 번 더 쪼개봐, 새끼야!" (ㅋㅋ 언니, 매드맥스 급이야 ㅋㅋㅋ) "머릿 속에서 네가 뭔 생각을 하든 난 관심 없어! 머릿속에서 여자를 얼마나 무시하건 추행하건 강간하건 난 모르는 일이야! 하지만 생각나는 대로 다 말하지 말라고! 그런 말! 말! 말! 하지마! 표현하지 마! 닥쳐! 닥치고 살아!" 아, 이렇게 박력 터지는 여자 조사관이라니, 짝짝짝. 이런 대사들 혐오 발언 일삼는 나쁜 사람들에게 직격으로 하는 말이죠? 표현하지 마, 닥쳐, 닥치고 살아!! 아, 씨헌타. 


암튼 이제 다시 세계문학전집 러시아 편으로 돌아갈 시간. 다른 분들은 고전을 어떻게 읽는지 모르겠구만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