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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그 담담하고 담대한 직업인으로서의 자세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6. 7. 22.

직업으로서의 소설가_무라카미 하루키



 

멀리서 지인이 보내준 하루키의 신작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리스본 숙소에서 받아보았다. (Special thanks 오디! 새콤달콤과 컵라면 귀요미들까지!!)  마침 가방에 들고 온 5권의 종이 책을 다 읽었을 때였다. 인터넷 속도가 느린 유럽에서 목숨을 연명하는 심정으로(?) 인터넷 빠른 곳만 찾으면 전자 책 다운로드를 시도하고는 했지만 역시 책이란 종이 책. ㅎㅎ 게다가 하루키!  


하루키 본인은 자신의 에세이는 “맥주 회사가 만든 캔 우롱차” 같은 것이고, 본연의 업은 ‘소설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읽는 입장에서는 ‘캔 우롱차’가 더 좋은 것을 어떻게 하나. (하루키 식으로 말하자면 '죄송합니다, 저로서는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만') 에세이에 투영되는 하루키 상은 소설 책의 풍취를 닮았다.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 트렌디 소설처럼 쿨하게 굴다가 일순간 사람의 마음을 치는 날카로움,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귀여운 유머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초기에 결혼하고 빚을 내서 재즈 카페를 꾸려가던 시절) “난방 기구도 거의 업어서 추운 밤에는 기르던 몇 마리의 고양이를 끌어안고 자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 고양이 쪽에서도 아주 필사적으로 우리에게 매달려 잠을 잤습니다.” (36쪽) 예전 에세이에서 고양이가 출산을 할 때 고양이 앞발을 꼬옥 잡아주었다던 하루키의 모습이 겹쳐진다.

 

게다가 글의 내용과 말투에서 구구절절 그의 소설에 깔려있는 세침하고 솔직한 개인주의적 분위기가 느껴진다. 허세를 떨거나 거들먹거리는 느낌이 없이 (이것도 참 재주지만) 이렇게 말한다. “소설이 안 써져서 고생했다는 경험도 (감사하게도) 없습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내 생각에는, 만일 즐겁지 않다면 애초에 소설을 쓰는 의미 따위는 없습니다. … 소설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퐁퐁 샘솟듯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7쪽) (장편소설을 쓴 다음 번역이나 에세이 등을 쓸 때) ‘소설 안 쓴다고 죽을 것도 아닌데, 뭘’하고 그냥 모르는 척 살아갑니다. (111쪽)  하지만 소설가로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결론은 평온하고도 충만하다. 마치 어떤 의무감도 지지 않은 채로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의 쿨한 버전이랄까. 내게 주어진 자격을-마치 상처 입은 비둘기를 지켜주듯이-소중히 지켜나가면서 지금도 이렇게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다는 것을 일단 기뻐하고 싶습니다. 그 다음 일은 또 그 다음입니다.” (58쪽) 나는 일견 무심한 듯 무겁지 않은, 저온 숙성 상태가 그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말투는 쿨해도 그의 자기 완결성은 생활을 글쓰기에 맞추는 성실한 자세에서 오는 듯 하다. 하루키는 이사크 디네센의 말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씁니다’를 인용하며, 장편소설을 쓸 때는 아무리 안 써져도, 아무리 잘 써져도 타임카드를 찍듯이 하루에 거의 정확하게 원고지 20매를 쓴다고 고백한다. 날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들고 컴퓨터를 켠 다음 즐거운 마음으로 소설을 써 내려간다. 또한 지속 가능한 소설가로서 살기 위해서 하루 분의 소설을 쓴 다음 한 시간 동안 달리기를 하고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기술적’ 글쓰기인 번역을 한다. 지속 가능한 글쓰기에 대한 그의 대답은 “단 한 가지, 아주 심플합니다. 기초체력이 몸에 배도록 할 것. 다부지고 끈질긴, 피지컬한 힘을 획득할 것. 자신의 몸을 한편으로 만들 것.” (181쪽)이다.  이 담담하고 담대한 자세라니. 





이런 자세는 소설을 쓸 때도 일관된다. 소설을 쓰고 나서도(세 번에 걸쳐 거듭 고쳐야 초고가 나온다) 제품이나 소재를 ‘재워두는’ 양생을 거친다. “일단 작품을 진득하게 재운 다음에 다시 세세한 부분의 철저한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155쪽) 그 다음으로 ‘제 삼자 도입’ 과정을 거치는데 이때는 한 가지 규칙을 따른다. “그것은 ‘트진 잡힌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어찌 됐건 고친다’는 것입니다. 비판을 수긍할 수 없더라도 어쨌든 지적 받은 부분이 있으면 그곳을 처음부터 다시 고쳐 씁니다.” (157쪽)


주로 자신의 글쓰기 작업과 문학상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지겹고 끔찍했던 학교 교육과 성찰 없이 효율만 바라보며 달렸던 일본의 ‘Go Go’ 문화(특히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해 비판한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곳에서 자유롭게 팔다리를 쭉쭉 펴고 느긋하게 호흡할 수 있는 개인 회복 공간”을 만들어내자고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이 세계를 살아가는 자세와 그 밑천이 되는 독서에 대한 그의 문장을 공유한다. 그야말로 심플하고 심오하니까. “어떤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아무래도 세계가 부글부글 끓어서 바짝 졸아듭니다. 온몸이 긴장하고 발걸음이 무거워져 자유롭게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시점에서 자신이 선 위치를 바라보게 되면, 바꿔 말해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뭔가 다른 체계에 맡길 수 있게 되면, 세계는 좀 더 입체성과 유연성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건 인간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자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독서를 통해 그것을 배운 것은 나에게는 큰 수확이었습니다.” (226쪽)           

    

자신만의 오리지낼리티를 발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우선 출발점으로서 ‘나에게 무엇을 플러스해간다’는 것보다 오히려 ‘나에게서 무언가를 마이너스 해간다’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105쪽)고 조언한다. 자신의 출발점은 그 이른바 ‘숭숭 뚫린’ 바람 잘 통하는 심플한 문체에서 시작해 시간을 들여 살을 붙여나간 것이었다고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