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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세상: 나는 음식에서 삶을 배웠다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6. 5. 4.

도서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잡지 책 읽는 시간을 애정애정한다. 읽어야만 하는 책, 일과 관련된 책, 사회 이슈 때문에 골라야 하는 책이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글자와 이미지를 눈으로 흡입하는 시간. 

Around, 행복이 가득한 집, 보그 등의 잡지. 

그러다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이런 기사를 발견했다. 


구첩반상을 대체할 완벽한 파우더

물에 타서 마시는 것만으로 끼니가 해결된다는 미래의 한 끼 

뉴욕에서 핫하게 떴고, 국내에서도 펀드레이징에 성공했다는 소문.


이 기사를 보고 나니 미래의 인간은 알파고와 유기체가 하이브로드 결합된 새로운 종일 것만 같아서 허겁지겁 대척점에 있는 책을 찾아 읽었다. 우리는 단지 탄소, 수소, 질소, 마그네슘, 비타민 등의 영양소를 세포에 제공하는 존재가 아니라 먹는 시간, 먹는 의미, 함께 먹는 사람을 느끼는 '먹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처럼. 먹을 것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볼 수 있는 그런 책이 필요했다.   





골라든 컨텐츠는 <<식탁 위의 세상: 나는 음식에서 삶을 배웠다>>라는 책.


식탁에 놓인 커피, 바나나, 랍스터, 초콜릿, 사과쥬스 등을 타고 "너, 어디에서 왔니?"로 거슬러 올라간다. 커피가 생산된 콜롬비아 농장 고원지대의 가파른 밭에서 커피를 따고, 새벽 4시 비오는 진흙탕길을 자전거로 달려 바나나 농장에서 등짐을 지고, 니카라과의 잠수부들과 바다 가재를 잡고, 사과농장이 있는 중국에서 농장주의 자식들과 식사를 하면서 음식을 통해 삶을 배운다. 물론 그 여정을 보여주면서 우리도 배우기를 원하는 것일 테고. 


가령 우리가 늘상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는 신문 기사 한 줄의 현실.       


"1991년에는 커피 재배국이 수익의 40퍼센트를 가져갔다. 하지만 2012년에는 10퍼센트만 가져가도 많이 가져가는 것이다. 소비자는 커피에 돈을 더 많이 쓰는데 생산자는 오히려 돈을 적게 번다. 중간에 있는 누군가가 양쪽으로부터 돈을 챙기는 것이다." 41쪽


"다국적 기업이 세계 식품 무역의 40퍼센트를 장악하고, 20개 기업이 사실상 세계 커피 무역을 독점하며, 6개 기업이 밀 무역의 70퍼센트를 장악하고, 1개 기업이 차 무역의 98퍼센트를 독점하며, 10개 기업이 전체 농약 판매의 90퍼센트를 차지한다. 6개 소매업체가 식료품점의 50퍼센트를 소유한다. 월마트만 해도 미국의 총 식품 소비액의 20~50퍼센트를 차지한다. 파텔은 세계 식품 산업이 합병되면서 “(농업 비즈니스에) 식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장 지배권”을 넘겨주었다고 지적한다." 141쪽 


식상할 정도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농장에 잠입하여 노동자들의 삶을 통해 보여준 르포 기사의 책은, 잠시 바나나를 덜 사게 했고 칠레산 포도 대신 국산 제철 딸기를 집어들게 했다. (책 효과가 떨어지는 한 달 뒤에는 어떻게 되질 모름 -_-, 그래서 또 이런 내용을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것 아니겄으?) 음식이 아니라 노동자의 삶과 분노가 치미는 농업 비즈니스의 세계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것도 미국 교과서에 실렸다는 작가의 센스 있는 말빨과 함께. 인류학자답게 인터뷰이와 인터뷰어와의 거리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 세계의 농업 문제를 자기 문제로 치환하여 감각적으로 벼려놓는 글빨이 마음에 든다. 


음식의 문제는 농업과 땅을 보는 태도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더 좋고 건강한 유기농 식재료를 넘어, 인간과 식물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유기체의 밑감이 되는 땅을 대하는 '에티튜드' 말이다. 


"민들레가 가득 피어 있는 집 앞에서 “아름답지 않다고 누가 그럽니까?” 데이브가 말한다. “뭐든 생각기 나름이에요. 화학약품 회사들이 우리에게 한 가지 생각을 주입한 겁니다. 그들은 민들레를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어요. 클로버도 마찬가지고요. 클로버는 콩과 식물로, 흙에 질소를 공급하는 비료 역할을 해요. 화학회사들은 클로버를 죽이는 살충제를 팔고 클로버가 다 죽으면 비료를 팔아요.” " 337쪽


 


화분을 베란다 난간에 놓고 키우면 온갖 '잡초'가 코딱지만한 화분의 공간을 비집고 씨를 퍼뜨린다. 가만 두면 내가 키우는 민트보다 날라들어온 클로버가 더 많아진다. 놀랍게도 클로버인지, 클로버 옆의 이름 모를 잡초에서인지 여리여리한 노란 꽃이 핀다. 잡초에서 꽃이 펴서 놀랍다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도 잡초라고 다 뜯어버렸던 내가 놀랍다는 거다. 클로버가 콩과 식물이라 흙에 질소를 공급하는 자연 비료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간헐적으로 베란다 난간 화분의 클로버를 뽑아 버리고는 했다. 생각해보니 민트에서는 꽃이 피든 안 피든, 민트 시럽을 해 먹든 안 먹든 애지중지하면서 말이다. 그냥 클로버는 사다 심은 것도 아니고 흔하고 무성하게 번성하는 잡초니까. 올해는 걍 두면서 노란 꽃을 보고 있다. 오래보아야 예쁘고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시구처럼 정말 그렇다. 야생화처럼 예쁘다. (생각해보니 이 또한 야생화!)


내가 지구에 남기는 임팩트가 궁금하다면, 혹은 나를 위해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노예'들의 숫자가 궁금하다면 http://slaveryfootprint.org/ 에서 알아볼 수 있다. 사는 곳, 성별과 나이, 가지고 있는 전자제품 수, 자녀수, 옷가지, 음식의 종류와 개수 등을 묻고 명쾌하게 답을 내려준다.  

     

마지막으로 딴지 하나.

어느 날 하루 밥상을 차리는 자신 곁에 있는 딸을 보며 저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가스레인지 앞에서 허둥댄다. 딸이 이렇게 생각할 거야 ‘엄마가 어떻게 되기라도 하면 우리는 끝이겠네.’ " 15쪽  

 

사무국 활동가들과 이 책을 읽고 같이 이야기했는데 과연 저자가 애가 둘 있는 여자였다면 이렇게 책을 쓸 수 있었을까라는 토로 성토대회 -_- 애가 둘 있는 남자는 가능해도 (어린) 아이가 둘 있는 여자는 아마 육아와 돌봄 때문에 전세계 곳곳을 나댕기며 이렇게 글 쓰는 삶을 살지는 못했을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특히 위의 표현은 저자가 가족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담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겠지만, 보아하니 평소에 이 집 살림은 부인이 도맡아 하신 듯. 결국 그 집 식탁은 부인이 차리나본데, 식탁 위의 세상에는 또다른 축 '젠더' 문제도 들어있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