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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각인시키는 시대에 저항하는 작은 것들의 신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6. 5. 26.

오래 전 인도를 두어달 여행한 적이 있다. 말갛게 어리고 말쑥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라 존재 자체가 민폐인데도 민폐인지조차 까맣게 모르던 20대 초반. 인도에 대해 개뿔도 모르는 채로, 가이드북 한 번 읽지 않고, 밤 12시에 뭄바이에 떨어지는 일정에도 첫 날 숙소도 예약하지 않은 채로, 그저 당시 같이 살던 룸메가 날마다 헤시시를 피워대며 보냈다던 인도 이야기에 빠져 비행기표를 샀다. 홍대 앞 클럽들에서 인도의 히피 고장이자 풀문파티가 열리는 고아에서 춘다는 '고아 댄스'가 유행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인도의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유일한 소설책 <<작은 것들의 신>>을 읽었다. 짧은 숏컷의 머리에 그렁그렁한 눈으로 연설을 쏟아내던 그의 사진과 명성에 익숙해서인지 단 하나의 소설책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물론 정치 평론집이나 인터뷰 책은 꽤 나와 있다. 그래도 글쟁이의 진짜 면목은 소설이나 시 아니겠는가. (소설과 시는 거의 안 읽으면서도 꼭 인용구 들이댈 때와 잘난 척 할 때만 불러낸다.)        


바로 이런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냥~


'지금 알았던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스타일로 말하자면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에게 인도행 비행기표 대신 <<작은 것들의 신>>을 쥐여주고 싶다. 인도를 알고 싶으면, 세계를 알고 싶으면, 인간을 알고 싶으면, 사랑을 알고 싶으면, 2달의 인도 여행과 20시간 동안의 <<작은 것들의 신>> 읽기 중 오직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그때 모르는 것들을 지금은 알고 있는 나는 그저 차를 홀짝이며 고요히 아룬다티 로이의 책을 읽을 것이다. 물론 여행에도 질의 차이가 있으니 나처럼 인도 여행에서 '고아 댄스'만 배우고 오는 사람의 경험치에서 하는 말이지만.


인도 케랄라 주의 뜨겁고 눅진눅진한 공기가 자욱한 안개처럼 소설 전반을 싸고 돌며 그 공기가 폐부까지 들어차 있는 사회적 관계들이 펼쳐진다. 과거와 현재가 범벅된 이야기 구성, 어린 쌍둥이의 문장을 거꾸로 읽는 말장난과 케랄라 언어인 말라얄람어가 시적으로 뒤섞인 표현들. 인도판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처음에는 매력있는 책이긴 하지만 내 스타일이 아니라 끝까지 읽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드라. 사실 난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찬양받는 소설도 대학 교양 수업 과제로 꾸역꾸역 읽었으니까 (교양 수업 학점을 낮게 받아 그 소설이 싫어진 것은 아니고? 뭔들... 어쩔...). 내 스타일이 아닌데도 당췌 뭔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추리소설설 밤새서 읽듯 책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마리아 코참마의 딸은 왜 죽었지? 누가 죽인 거지? 무슨 일이 있었지? 중간을 넘어가면서는 이 죽음의 플롯과 범인은 하등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작은' 죽음과 연결된 다른 큰 '죽음들'의 의미를 서늘하게 꼽씹게 되니까 말이다. '대문자' 역사들이 쥐락펴락하며 갉아먹어버린 '소문자' 삶들의 스러져간 흔적들, 그리고 그 속에 들어있는 작은 것들의 신. 케랄라 한 지주 집안의 가계라는 작은 것들을 통해 펼쳐지는 인간의 역사.


"에스타펜과 라펠이 그날 아침 목격한 것은, 비록 그때는 몰랐지만, 지배권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을 보여주는, 통제된 조건에서 진행된 임상 실험이었다. 구조, 질서, 완전한 독점을 추구하는 본성, '신의 의도'를 갖아한 채 어린 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인간의 역사였다." 


남자들의 욕구, 실연實演 중인 역사      

한 시대가 그 시대를 살고 있던 이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킨 것이었다. 

422쪽


이화경의 책 <<열애를 읽는다>는 세상의 차고 넘치는 연애소설 중 마르케스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에 등장하는 문장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를 기준으로 삼았다. 사랑의 전후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만드는 사랑, 포개질 수 없는 존재의 이원성 앞에 절감하면서도 그 이원성을 감사히 수용하게 하는 사랑, 사랑의 금기를 그어놓는 대문자 역사들에 부나방처럼 날라들다 불타죽어버리는 작은 것들의 가엾은 사랑. 마지막 장인 '삶의 대가'에는 그런 사랑이 들어차있다. 아름다고 섬세하고 우아하고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사랑의 모습. 



"생명이 그 춤을 안무했다. 두려움이 박자를 맞췄다. 그들의 몸이 서로에게 응하는 리듬을 정했다. 쾌락의 전율 하나하나에 대해 그와 동일한 정도의 고통을 치르리라는 것을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

그들 뒤에서 강이 어둠 속을 지나면서 고동쳤고 거친 실크처럼 빛났다. 노란 대나무가 울음을 울었다. 밤이 팔꿈치를 물위에 괴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463쪽 


인도의 케랄라 주에 간다면 가이드북뿐 아니라 <<작은 것들의 신>>을 읽기를. 인도에 가지 않더라도 작은 것들의 사랑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기를. 인도의 특수하고도 사랑의 보편적인 이야기에 감동받으며 나는 조금씩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사랑 말고도 좋은 책 역시 (언젠가는 바위를 뚫는 낙숫물처럼 아주 더디지만)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