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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 에코페미니스트의 행복혁명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6. 7. 25.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 에코페미니스트의 행복혁명



(아잉, 콜라는 내가 시킨 것이 아니라니까 -_-;; 다른 사람이 시킨 거~)



안식년을 맞아 여행을 떠나면서 내가 일하는 단체가 펴낸 책을 가방에 꽁꽁 챙겨 넣었다. 일에서 손을 떼면 일 뒤 꼭지도 안 보고 싶어 하는데, 나는 이 책이 읽고 싶어서 마음이 근질근질했다. 그러니까 일과 상관없이 순순히 독자로서 책을 골랐다는 뜻이다. 것도 휴가 온 여행지에서 꺼내 읽을 만큼. 예전에 출판된 마리아 미즈와 반다나 시바의 에코페미니즘 관련 책들을 열심히 읽었고(그러니까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는 거 아니겠으), 세 모녀의 올망졸망한 이야기가 가슴을 두드리는 <<없는 것이 많아서 자유로운: 세 모녀 에코페미니스트의 좌충우돌 성장기>>도 좋았다. 


하지만 큰 틀에는 끄덕끄덕거려도 마리아 미즈의 이야기는 독일을 중심으로 제 1세계에, 반다나 시바의 이야기는 인도를 중심으로 제 3세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반면 <<없는 것이 많아서 자유로운>>에는 에코페미니즘적 삶을 구현하고자 하는 한 여성과 그 딸들의 귀촌 경험담이 펼쳐져 있었는데, 뭔가 이를 묶어주는 에코페미니즘적 담론은 부족했다. 나는 헬조선, 세대 갈등, 경제 침체, 여성 혐오, 너나 없이 ‘불행’ 경쟁에 빠져있는 한국적 상황에서 에코페미니즘이 대안적 담론과 실천의 방식으로 어떻게 밑감이 될 수 있는지를 읽고 싶었다. 한 마디로 ‘지금, 여기’에서 에코페미니즘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고 싶었달까.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는 그런 면에서 삽시간에 책장을 휘리릭 넘긴 책이었다. 세월호를 생명 돌봄의 관점으로 읽어내는 글, 대량소비와 대량생산을 운명처럼 짊어진 도시에서 어떻게 에코페미니스트로 아슬아슬하게 살아갈 것인가의 고민, 가부장제와 육체 산업의 전쟁터가 된 여성의 몸과 자연, 개인적 돌봄을 사회적 돌봄으로 전환하는 일, 비혼 여성이 몸으로 일구는 반농반X의 삶, 영화 ‘매드맥스’의 한 장면이 생각나는 토종종자와 여성농민으로 대변되는 씨앗 페미니즘,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 마을 공동체, 마르쉐@등의 실제 사례로 알아보는 대안운동, ‘어머니’ 모성이 아니라 생명 감수성으로 조직된 ‘생명모성’의 힘, 다시 피어난 탈핵 운동, 밀양 할매들 송전탑 반대운동, '여성'적 운동의 힘, 여성의 삶과 시간이 한데 어울러 대대로 이어진 남도 살림예술, 그리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한데 그러모으는 에코페미니즘 담론에 대한 개괄적 글까지, 풍성하고 쉽다. 쉽다는 의미는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한껏 품고 해답은 없지만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에코페미니즘에 대한 이론서는 국내에도 몇 권이 나와있다. 그러나 연구자도 아니고 이론에 별 관심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은 문화적 에코페미니즘, 사회적 에코페미니즘, 어쩌고 저쩌고를 분류하며 그 사조를 따져본들 남는 것은 여신과 여성성 강조하는 파트는 내 취향 아니고, 유물론 대입한 것은 좀 내 스타일~, 뭐 이 정도 자신의 취향을 확인하는 선에 그치고 만다. 그래서 자신의 운동을 에코페미니즘에 대입시켜 가며 그 의미와 한계, 그리고 에코페미니즘의 방향을 집어주는 곳곳의 문장이 와 닿았다. 예시와 삽화가 풍부하게 실려 감이 잡히는 참고서를 읽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강남순 선생님은 세월호 글을 풀어내면서 페미니스트들이 에코페미니스트들을 경계(?)하는 한 축이 되는 ‘생명’, ‘모성’, ‘어머니 자연’ 등의 강조를 이렇게 전복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여성성과 자연을 찬양하는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사상이 아니라 세상의 근본을 이루는 ‘이원론적 사유 방식, 지배의 논리’를 뒤집어 엎는 급진적인 이론이다. 


“21세기 에코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여성에 대한 낭만적 이해를 경계해야 한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자연 친화적이고, 생명을 사랑하는 존재이며, 평화를 지향하는 존재라는 이상화된 낭만주의적 이해 말이다. 초기 에코페미니즘이 비판적으로 제기한 가치 위계주의, 이원론적 사유 방식, 지배의 논리라는 문제를 겨냥한 비판은 매우 중요하다. (25쪽)  


그러니까 너와 나의 평등, 너의 몫과 나의 몫의 균등한 배분을 넘어 평등의 판 자체를 뒤집고 몫을 부여 받을 수 있는 대상을 확장한다. 에코페미니즘에서 말하는 ‘생명모성’이란 생물학적 모성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생명적 감수성을 지닌 ‘다른’ 인류를 지칭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위계 체계에서 더 높은 것을 선망하지 않고 지금 이곳에서의 소박한 삶을 충분히 누리는, 이를테면 ‘유일무이성의 인류’, ‘결핍을 잊은 인류’의 탄생이 필요하다. … 로지 브라이도티는 생명을 타자성과 만나면서 존재론적으로 끊임없이 변형되는 생성의 힘으로 보고, 이것을 조에(zoe)라고 불렀다. 조에는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 한계, 취약성을 부정하거나 초월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 충분히 머물면서도 쾌활함을 유지하는 윤리적 자유의 힘, 생명체로서 우리가 지닌 본원적 힘이 바로 조에다. – 이를 ‘생명모성’이라고 부른다.” (150-151쪽)


마지막에는 에코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지칭하는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꾸려나가야 할 일들이 제시된다. “보살핌의 사회화(정치화), 지역의 다양한 여성들의 아우를 수 있는 의제와 참여 공간을 창출할 것, 에코페미니즘 관점에서의 시민권에 대한 고민- 낸시 프레이저가 말한 여성들이 논의하고 실험하고 정책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확보할 수 있는 ‘하위의 공적 영역(subaltern public sphere)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132쪽) 


이 알 듯 말 듯한 문장의 의미는 각 글마다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사례를 통해 흩뿌리듯 드러나 있다. 예를 들어 도시에서 자급적 관점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김현미 선생님은 “도시에서 에코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자기 돌봄을 통해 결국 지속 가능한 삶이라는 ‘공동의 책무’를 함께 지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친구와 동지를 만나는 과정이다.”(31쪽)라고 말한다. 아니 이렇게 내가 말하고 싶었던, 하지만 속에서만 우물우물 묵사발이 되어 형체가 안 잡히는 언어를 명확하게 문장으로 제시하다니. (아, 좋으다) 돌봄의 사회화를 다룬 이안소영 선생님의 글에는 “돌봄의 ‘사회화’는 필요하지만 개별 가정에서 공적 장소로 이동하는 공간적 측면에서의 사회화보다는 가치를 공유하고 확산시키는 사회화를 좀 더 진지하고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71쪽)


아쉬운 점은 예시와 삽화가 풍부하게 실려 뭔 말인지 감이 잡히는 참고서를 읽기는 했는데, 실전 문제집을 풀 만큼 구체적으로 적용시키지는 못 하겠다는 점이다. 뭐, 이건 씹어서 소화시켜 주기까지를 원하는 나의 과도한 욕심과 허약한 체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노동과 삶 부분에서 앙드레 고르가 제시한 ‘자활노동-자율노동-타율노동의 창의적 재분배’가 제시되었는데 이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 조건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의 지점을 더 파고들지는 않았다. 혹은 자활, 자율, 타율노동을 재분배하는 사례가 자세히 드러나면 좋겠다 싶다. 주 4일 근무에 1일 5시간 노동을 기본 원칙으로 삼은 여성협동조합 이야기가 잠깐 나왔지만 생계가 어떻게 꾸려지는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자활, 자율, 타율노동이 어떻게 변해가는지의 구체적인 결이 잡히지 않는다. <<8시간 노동 VS 6시간 노동>>이라는 책에는 세계 최초로 1930년대에 6시간 노동제를 정착한 켈로그 회사 이야기를 통해 노동자 삶의 변화와 대안적 삶의 모습이 그려진다. 또한 노동시간 단축과 기본소득이 언급되기는 했지만 ‘지금, 여기’에서, 좀더 에코페미니즘적 관점에서 풀어내지 못하고 그저 필요성을 제시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경제를 어떻게 다시 사회로 편입시킬지에 대한 큰 그림의 글이 빠져 있다. 칼 폴라니 식으로 말하자면 사회에서 빠져 나와 독보적으로 ‘악마의 맷돌’을 돌리는 경제 시스템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의 문제가 다뤄지지 않았다. 사회의 판을 다시 짜고 싶다면, 대안적인 사회를 고민한다면, 에코페미니즘은 ‘경제’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물론 모든 글들은 적건 많든 먹고 사는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좀더 큰 그림의 경제 시스템을 어떻게 재조직할 것인가에 대한 에코페미니즘적 담론의 필요성이다. 


그런데 말하고 보니 책 한 권에 뭘 그리 많이 원하나, 이런 생각이 든다. (염병, 너라면 하겄냐고) 

그저 내가 일하는 단체에서 펴낸 책에 대한 애정과, 내가 일하고 살고자 하는 삶의 고민을 책이라는 영매를 통해 귀신 말문 터지듯 쏟아냈다고 생각해주시길. 에코페미니즘 관점으로 ‘지금, 여기’의 삶을 다루는 더 많은 책을 보고 싶다. 그러기에는 에코페미니즘이 좀 마이너이지만. 하지만 스웨덴 통계학자의 말처럼 “지금 페미니즘이 한국 사회를 구원할 것”이기에 우리는 더 치열하고 구체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