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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그리고 장정일.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3. 8. 5.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는 한병철의 '피로사회'처럼 성과주의 사회, 자기착취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그보다 훨씬 수월하게 읽히고

학계의 '알랭 드 보통'처럼 여기저기를 넘나드는 박학한 문체가 지적인 허영을 채워주고

<섹스, 성형수술, 통증, 일중독, 바겐세일, 놓아두기>처럼

현대인들의 키워드를 목차에 차곡차곡 올려두었다는 점에서

칙 읽는 즐거움을 선사해 준 책이다.

더불어 이렇게 현상과 텍스트의 결을 풍성하게 읽으라고 철학이 필요한 거구나, 하고

철학의 존재를 확인시켜준 책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강을 건너는 누떼처럼 미친듯이 바겐세일에 달려드는 현대인을 설명한 부분.

"철학자 마르쿠제는 이렇게 말했다.

생산과정에서 분리된 소비의 영역에 행복이 국한되었고,

이로써 생산과정과 소비과정, 노동과 향략의 합리적 일치가 일치가 불가능한 사회에서

행복의 개별성과 주관성이 견고해진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자기 안에서 인위적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인위적 갈증이 현대 소비문화의 원칙이다. "


혹은 놓아두기를 제안하는 책의 마지막 부분.

"인간이 무조건적으로 신을 믿었을 때만 해도 삶은 운명이었고 죽음은 행복한 내세의 희망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계몽주의와 더불어 인간은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이성을 이용하는 법을 배웠고

그의 인생 전반을 조정하던 형이상학적 결정의 자리에 자기 자신에 의한 결정을 앉혔다.

그러나 이 해방의 행동에도 이면은 있었다.

...

모든 결정에서 해방된 인간은 자유롭다.

하지만 언제쯤 되어야 창조가 충분한지 누가 말해준단 말인가?

자기 몸을 유토피아적 이상에 맞추려 계속 애쓰고만 있는데 도대체 누가 경계를 그어준단 말인가?

병적인 정도의 야망에 휘둘리고 있는데 누가 저지해준단 말인가?

...

아도로노는 "승처럼 아무 것도 하지 는 것, 물 위에 누워 평화롭게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더 어떤 규정할 것이나 실현할 것도 없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생산의 맹목적 분노를 규탄하고

놓아두기를 진정한 자유로 이해하라고 제안한다."


책을 만족스럽게 덮었을 때

장정일이 쓴 "1%의 우울이 99%의 우울과 같나'는 시사인 기사를 보았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525144308577

그는

"두 사람은 공통점이 아주 많지만,

한병철이 계급 사이의 적대를 말끔히 소거하여 정치가 생겨날 수 있는 공간을 한 치도 열어두지 않은 것과 달리,

그보다 한참 젊은 스베냐 플라스러는 이 대목에서 매우 조심스럽다.

그녀는 자신의 논리 속에 사회구조나 계급 사이의 긴장을 의식한다.

하지만 역시 성과사회가 치열할수록 착취가 더욱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는 갑과 을의 관계에 대해서는 말문을 닫았다.

...

독일에서 온 두 거장의 문제점은 이들이 1%와 99%로 나뉜 세계 가운데 99%를 거론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1%도 99%와 하등 다르지 않다고 강변한다는 점이다.

'우리도 자신을 착취하고 있어!'라고 말이다.

이런 담론이야말로 1%가 천금을 주고서라도 널리 퍼뜨리고 싶은 현장부재증명이 아닌가?"

(범죄가 일어난 때에, 피고인 또는 피의자가 범죄 현장 이외의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을 주장함으로써 무죄를 입증하는 방법)


역시 장정일.

책을 덮고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

이 역시 '권태'의 시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여름 휴가이기에 가능한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