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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에 잠긴 유자차처럼 그녀들의 삶이 켜켜이 담긴 만화책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3. 1. 15.

마포 평생학습관의 연필드로잉 강좌는 하루 만에 자리가 꽉 찼고

이지 드로잉이니 뭐니 드로잉 관련 책이나 워크샵도 많이 나온다.

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의 말 "몇 장 넘기지도 않았는데 여러 번 울컥한다"는 책표지 카피에 눈이 갔고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라는 제목에 꽂혀버렸건만,

마스다 미리의 만화책은

'드로잉, 이라는 거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니구나, 당장 드로잉 혼자 해봐도 되겄다'라는 자신감을 줄만큼

선이 단순하고 여백이 많았다.

그리고는 깨닫게 된다.

단순하고 군더더기 없고 그 모든 장식을 덜어낸 원칙 같은 것만 존재하는

이 만화는 다 큰 녀자들을 위한 진정성 있는 그림 에세이라는 것을.


다 큰 언니들을 위한 만화 라인 중에 '그녀들의 브런치 Ladies brunch'가 있다. 

할리퀸 로맨스를 보고 자랐을지도 모를 언니들이 이렇게나 생활인이 되어 새벽 3시까지 야근을 하거나

유부남과 섹스를 하거나 도시의 직장에서 실패하고 비맞은 멍멍이처럼 처량하게 고향으로 내려가거나 한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언니들보다 훨씬 소박하지만 삶의 고민은 비슷비슷한 여성들의 삶이

설탕에 켜켜이 잠긴 유자차처럼, 만화책의 페이지에 켜켜이 담겨있다.

하지만 마스다 미리의 만화는 레이디스 브런치라는 이름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담백하다. (레이디스 브런치 라인도 아니다!)

한번도 감정의 과잉 같은 게, 여자들의 자기 연민 같은 게 안 나온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울컥.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은지 아닌지도 안 나온다.

다만



오늘 생리통이 몸이 안 좋다는 나의 말에  

"난 아이를 낳았더니 사라졌어. 사와코도 빨리 낳아"라고 말하는,

날마다 밥을 같이 먹는 직장동료의 '성희롱'을 용인하기보다는

'아직은 상처받는 나로 남고 싶다'는 에피소드가 나와있다.



아이가 아파 감기에 걸려 직장동료의 몫까지 다 해야 경우에

"괜찮습니다. 어려울 때는 서로 도와야 하니까요."라고

마음을 추스려보다가도


  

뒤돌아 선 순간

"내게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데"
가슴을 치고 지나간다.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보다

신기루만 같았던, 그런데 화수분처럼 넘쳐나는 세월 덕에 어느 새 중년이 된 나에게   

'이대로 나이만 먹고 '아무 것도 되지 못한 채' 끝나는 것일까'라는 문구는 레알 낚시.

마스다 미리의 다른 책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도 안 볼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되지 못한 전업주부가 원하는 것은 존재감,

그리고 아무 것도 되지 못한 싱글이 원하는 것은 보장. 

이렇게 한 마디로 내 마음을 콕 집어 표현하는 것을 일컬어 촌철살인이라고 하는거쥐.



아이도, 남편도 문제 없고 경제적으로도 문제 없는 전업주부 그녀는

"원하는 것이 없다, 그러니까 행복하다"가 아니라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되뇌인다.

이런 고민마저도 '사치스러운 고민'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일을 찾기보기로 한다.

남편은 "난 당신이 일하는 것 찬성이야, 단, 집안 일에 지장이 없어야 해" 라고 하고

친정 엄마는 "애가 좀 더 클 때까지 엄마가 집에 있어줘야지, 돈이 없냐?"고 말하고

싱글 고모에게 "일은 하고 싶은 게 전부가 아냐"라는 말을 듣고 온 딸아이도 그 말을 전한다.

월급은 얼마 되지도 않고, 집안 일은 똑같이 해야하고,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없다면 도대체 왜 일해야 하지?

그 다음 장.

한 장 전체가 아무 것도, 아무 말도 없이 백지로 뒤덮여 있을 뿐.


겨울에 따순 나라로 떠나는 2주 간의 해외 여행 빼고

금요일 밤 전기장판과 혼절일체가 되어 귤 까음시롱 밤새도록 야오이를 보는 것은 나의 최대 사치이다.

그런데 마스다 미리 만화를 보면서

야오이가 아니라 이렇게 내 삶에 적나라한 만화를 보는 사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야오이는 다른 의미로다가 적나라함 ㅋ)

또, 여자로 태어나 여자 만화에 절절하게 공감하는 지금 인생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