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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대가로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늙을 수 없다면?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3. 8. 14.

마포구립 서강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는데

이번 여름엔 대출 중인 예약도서를 3권이나 손에 거머쥐게 되었다.

흔히 도서관에서 신간이나 인기도서를 빌려보기 어렵다고 하는데 (다 대출중이라~)

'예약하기'를 해 놓고 신간이나 인기도서가 아닌 재미난 다른 책들을 읽고 있자면

어느 날 "예약 도서가 도착했습니다"라는 문자가 날라든다.

문자로 '기프티콘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이 온 것만큼 뿌듯한 기분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한다.

'어제까지의 세계', '불평등의 대가', '철학자처럼 느굿하게 나이드는 법'을 모두 예약해서 빌려보았다.

그리고 휴가 때 평일 낮 한적한 도서관에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느긋하게 책을 읽었다.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드는 법'은 영화 '비포 미드나잇'에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바라보는 광경을 생각하며 읽었다.

단, 가까이 있으면 여행이고 뭐시고 기여이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야 마는 가족이 아니라

초고령기를 어떻게 보내야할지 하이데거와 플라톤, 에피쿠로스의 철학책에 홀로 묻는

노쇠한 육체의 75세 노인이 바라보는 바다 너머의 반도.

그는 수천 달러와 1년을 꼬박 앓아야 하는 임플란트 시술을 포기하고,

어떻게 늙어야 좋을지 그리스에게, 철학에게 묻고자 한 달의 여행을 떠난다. 

'비포 미드나잇'에서 서로 다른 세대가 어우러져 야외 정원에서 한낮의 식사를 하는데, 

이 책에 나온 그리스 노인인 타소와 친구들을 보면 그 따뜻하고 위트 넘치며 자연스러운 점심 장면이 생각난다.

아마 지중해 식 파란 바다와 그 옆을 수 놓는 흰색 지붕의 그리스식 풍경보다 더 아름다울 것이다.



'노인특별 할인요'이라니!

식당 주인은 계산서를 가져오지 않고, 노인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만큼만 내고 나간다.

65세 이상 지하철 무임승차는 서울시가 건네는 관료적 복지처럼 느껴지지만

계산서를 가져다주지 않는 배려는 인간의 얼굴을 한 복지처럼 따뜻하다.

(하지만 난 관료적 복지라도 환영하는 입장임 -_-;;)


이 책엔 즐거운, 어쩌면 미국인으로 시각으로 낭만화된 그리스가 잔뜩 나온다.

재정이 바닥난 그리스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지 못하는 연금 생활자들이 크레타 섬으로 귀촌하여 농사를 지으며

"여기서는 단 1유로도 쓰지 않고 일주일을 생활할 수 있어요. 농장에서 신선한 식품을 수확하고,

올리브오일처럼 특별한 것이 필요하면 이웃 농부에게 얻을 수도 있지요." 라고 말한다.

(여기가 쿠바냐? 석유와 화학비료를 외부에서 못 구하자 유기농업으로 자급을 시도한 -_-;;)

기차를 반대 방향으로 타자 기관사가 맞은편 기차를 불러서 세우고

환승버스처럼 이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 철도길 한 가운데서 잠시 정차해도

승객들은 아무 불만없이 기차길 근처의 과수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으며 기다린다.

다가 철학책을 여행 돌돌이 가방에 가득 채우고 여행을 떠난 사람답게 어록들이 곳곳에 포진해있다.



에피쿠로스의 말

"늙은이는 항구에 정박한 배처럼 느긋하게 행복을 즐긴다"



'여분'의 삶을 의료기기에 의존하여 생존할 것인가, 아니면 '때'가 되면 자살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맹자의 말로 대신한다. "사람에게는 삶보다 더 원하는 것이 있고 죽음보다 더 싫은 것이 있다." 


그리스 풍경의 일러스트가 책의 마디마다 빛나는, 행간도 느긋하고 에세이도 술술 읽히는 이 책을 읽으며

한강공원의 세븐일레븐 편의점에서 밤마다 교대로 일하시는 중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드는 '아르바이트' 분들을 생각했다.

과연 저자의 말대로 살림의 규모를 줄이고 생활수준을 '약간' 낮추는 개인적 선택으로

'영원한 젊음'의 함정에서 빠져나와 느긋하게 철학자처럼 늙어갈 수 있을까.

그보다는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구구절절 옳은 말만 읖어대는 책 '불평등의 대가'가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

스티글리츠 책을 보면, 현실에 열불이 터지면서 이 분을 미국 대통령이라도 시켜드리고 싶은데 

(스티글리츠도 나름 보수적이라고 평가되지만, 그가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에서 제안한 것만 채택돼도 살만 하겄다!)

그는 불평등의 대가의 맨 첫 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분열되지 않은 세계와 국가를 유산으로 상속받기를 바라며  이 책을 쇼반, 마이클, 에드워드, 줄리아에게 바친다."

불평등하고 분열된 세계가 개혁되어, 개인적 욕심을 버리고 성찰할 시간을 갖는 것만으로도 느굿하게 늙을 수 있기를.

그렇다면 세븐 일레븐의 알바 노동과 쪽방과 무더위와 한파의 삶에서 해방되어

천천히 천천히 항구에 정박한 배처럼 늙어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