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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 day

죽기전에 맨정신으로, 유언장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1. 10. 25.
왕가리 마타리가 죽었다.
스티브 잡스가 죽었다.
그리고 언니가 죽었다.

나는 온전히 받아들이는 듯하다.
간 보호제, 수액, 비타민이 든 영양제, 마약류 진통제가 몇 개의 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생이란 평생 주사 라인에 의지하고 살수는 없는 그런 거니까.
수혈로 에이즈에 걸린 소녀라던가,
갑자기 희귀난치병에 걸렸는데 들어놓은 보험 하나 없어
몸 아픈 것도 서러운데 살림걱정에 돈걱정에 마음까지 만신창이가 된 것도 아니고 말이다.
뭐, 특별할 것이 없었다.
보통의 존재의 보통의 말소.
그러니까, 언니 안녕.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어떤 보통의 존재도 개인의 관점에서는 특별한 존재라서
나에게는 왕가리 마타리보다, 잡스의 아이폰보다 훨씬 소중했다.
마치 개인의 삶에서 통계란 그저 0과 1의 숫자로만 의미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통계상 인구집단의 99%가 걸리지 않는 병이라도 해도
결국 개인에게는 그 병에 걸리느냐, 안 걸리느냐라는,
0과 1의 이진법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세상의 통계 밖, 나의 이진법 세상에는 언니가 존재했다.

생전 처음, '나의 이진법 세상'에 속한 사람의 장례를 치뤘다.
따뜻한 마음들, 고마운 마음들도 많았지만
세러모니만큼 가부장제가 극대화되는 시간도 없었다.
상주옷을 입은 초등학교 4학년 짜리의 발에 신겨진 뽀로로 양말을 보니
아들이라는 이유로 저 나이에 상주노릇해야 하는 제도에 환멸을 느꼈다.
효도가 부모 옆에 사랑스럽게 머무르고 챙겨주는 마음이 아니라
장례식장 앞의 화환에 걸쳐진 '직분'으로 완성됨을 알게 되었다.
일이 끝나고 KTX나 비행기를 타고 내려와 다시 새벽에 올라가 그 날 아침 출근하는 내 친구들이
왜 따뜻하게 손만 잡아주면 안 되고, 돈봉투를 내야하는지,
나는 너무 미안하고 너무 미안했다.
얼굴만 봐도 충분한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돈이라서 따뜻한 마음을 돈으로 표현하는 것도 이해하지만
신랑신부처럼 뭔가 돈 써야 하는 곳이 있지도 않고 돈 없어서 장례식을 못 하는 것도 아니잖아.
부조금 봉투를 보며 박완서 씨를 생각했다.
가난한 문인을 위해 부조금을 받지 말라,고 했던.

경제학자 이정우 교수의 아버지 장례식에 다녀온 친구가 그랬다.
정중하게 모든 부조금을 거절하는 모양새를 보니
자식들이 아버지 장례를 책임질 능력이 되고, '예외'를 합의할만큼 서로 소통이 되고, 
식장에 방문한 사람들도 괜시레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그 가족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인상적이었다고 말이다.

(심지어 어떤 대학 후배는 내 친구를 통해서 부조금을 보내왔다.
 "도대체 걔는 누군데 돈을 보내냐?" 라고 친구에게 물었더니
실은 니가 죽었다고 문자를 잘못 봐서 예의상 보냈대, 라는 답변을 들었다.
이거 돈을 돌려보내야할지 어쩔지 -_-;;;)

겪어보니 맨정신 있을 때 내가 원하는 장례절차를 정하고 싶어졌다.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하고 충분히 뜸을 들여 마음 속 내가 원하는 바를 주위에 전한 다음 죽기,
는 실로 엄청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됐으니까.

내 장례는 내가 살던 집에서, 그 집에서 소화할 수 있는 수의 사람들로만 치루고 싶다.
내가 지정한 절친이나 파트너가 그 사람들을 초대해주면 좋겠다.
일년에 한 번도 볼일 없으면서 장례식에 모여 스펙 따지는 친척들은 그 날 쉬셔도 좋겠다.
부조금 봉투는 없애고, 초대받은 분들은 나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정해 봉사를 해 주면 좋겠다. 
예를 들어 내 절친, 주발이는 장례식 기간 동안 그녀의 네스카페 캡슐 커피 머신을 내놓아
장례식 방문자들에게 크레마가 구름처럼 덮여있는 커피를 선사해달라. 에스프레소도 쏘라! 팍팍!! 
혹은 나랑 일한적 있는 박은진은 드립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공정무역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달라.  (합의 하에 반나절 씩 쇼부를 봐서 교대근무하라!)
뭐 감잎차나 메밀차도 있어야겠지. (내가 좋아했으니까 -_-;;)
현재 룸메 씨앗과 깡샘은 두레생협에서 산 고구마와 찐빵 등 친환경 먹거리를 준비하라.
아니다, 스윙 시스터즈에서 춤 배운 씨앗은 스윙 친구들과 함께 공연해달라!
나 특히 찰스턴 활용한 스텝 좋아한다.
('써니'처럼 장례식장에서 춤춰도 선물은 없다)

그리고 각막과 모든 가능한 장기를 기증해주시라.
(사랑의 장기기증본부에 이미 서약했으나 주민등록증 갱신하면서 스티커 사라졌음)
장기 기증할라면 절대 암 걸리면 안 되니까 이제부터 스트레스 덜 받아야지.

오동나무 코트고 나발이고
살아생전 철저히 이기적이었으니 죽어서라도 뭔가에 보탬이 되고자
티베트인가 어디선가 시체를 토막내어 독수리가 먹기 좋게 벌판에 뿌리는 '조장'이 좋겠지만
여기는 독수리가 많지 않은 듯 사료되니
현실적으로 수목장이 좋겠고 내가 젊은 나이에 죽지 않는 한 내 파트너도 내 옆에!
수목장은 과수나무, 특히 무화과 나무 부탁해요~
어릴 때 아빠가 우리집 마당에서 무화과 따줄 때 달달한 그 맛에 행복했삼. ㅎㅎ

아, 생각해보니 나는 통장 잔고가 웬만하면 비어있다!! 
장례식 할 때 돈이 들면 우선 친구들에게 변통하고 향후 전세 빼서 그 돈으로 충당하면 쓰겄다.

말하고 나니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선언하고 만 기분이다.
이제 자야겠다.
그나저나 오래 건강하게 살아야할텐데.
가늘고 길게.
내가 떠올리는 이상적인 죽음은 아주 늙어서 파트너랑 찜질방 가서 뭐 맛난거 먹고
사우나실 보석방에서 손잡고 자는 도중 뜨거운 기운에 뭣도 모른채 함께 죽는 것이다.
어느 날 버스에서 찜질방에서 함께 자다가 돌아가신 노부부 뉴스를 들었는데
사정은 모르지만 내 마음대로 각색해서 판단하자면
꽤 괜찮다고 생각되었다.
먼 훗날 그럴 수 있기를 기도드린다.



언니,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