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북으로 길에서 김애란 작가의 <<안녕이라 그랬어>>를 들었다. 그래선 안 됐다. 출근하다, 자전거를 타다, 전철에서 울컥할 때가 많아서. 길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를 때가 생겨서. 남의 눈이 없는 침실에서 꺼내 읽어야 했나 보다.
책의 뒷편에 실린 신형철 평론가의 다음 구절은 이 책을 정확히 '재현' 한다. 문학을 왜 읽어야 하는지 묻는다면, 대답 대신 이 책을 읽어보라고 하고 싶다. 김애란 정도 되면 문학 자체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김애란 정도 되면, 즉 한 작가가 자기만이 아니라 문학 자체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면, 그를 통해 문학의 본질을 곧장 말할 수도 있게 된다.
...
김애란의 재현에 대해서는, 누군가를 사회학자라고 규정할 자격이 사회학자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면, 나는 김애란이 오랫동안 사회학자여고 이제야말로 유감없이 그렇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가장 꽂힌 부분은 중년이자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젊음의 뒤안길에 접어든 내 세대가 처한 마음의 자리를 사회학자처럼 묘사한 문장들이었다.
분명<좋은 이웃>이나 <빗방울> 등 다른 단편이 더 좋았는데도, 유난히 밑줄 그은 부분은, <이물감>에 쏠려 있었다.
"SNS에 가입해 처음으로 희주의 계정을 찾아본 날도 그날이었다. 그저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데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부정과 경멸의 대상이 된 것 같았던 날. 이제 자신이 빼도 박도 못하는 기성세대가 됐음을 자명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밤 말이다."
...
"사실 정신을 단속하는 일이라면 조금 자신 있었다. 나이들어도 세상 소식에 귀를 열어두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면 주변에 크게 폐 끼치는 존재는 되지 않으리라 과신했다. 실제로 기태의 젊은 시절 꿈은 훌륭한 어른은 못 돼도 산뜻한 중년은 되는 거였다. 청결한 옷을 입고, 타인과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젊은 세대를 지지하고, 주변에 해가 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 긴 시간이 지나 기태가 진심으로 놀란 건 자신이 어쩌면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기태는 자신을 둘러싼 좌표는 그대로되 ‘나’ 라는 점만 이동하리라 착각했었다."
나와 동시대를 함께 나이 들어가는 김애란이라는 대단한 작가가 있어서, 그가 짚어내는 내 마음의 소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게 위로가 됐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이물감>의 주인공 기태의 파트너가 하는 말 "자기야, 근데 나이드니 마음이 넓어지는 대신 얇아져서 쉽게 찢어지더라."에는 열렬히 물개 박수를 보내고야 마는 거였다.

다른 단편도 모두 길에서 듣기 아까울 정도로 좋았지만, 그럼에도 하나만 뽑자면 <좋은 이웃>이었다. 내 나이대 어느 한 시절의 가치와 문화를 공유했다고 믿었던 세대가 어떻게 허상이 되어버렸는지, 사회심리학적으로 씁쓸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그 원인과 결과마저 처절하게 잘 알고 있다. 아, 뼈 때리네.
"그 빛에 의지해 남편이 밑줄 그은 문장을 눈으로 천천히 따라 읽었다.
“아저씨.”
신애는 낮게 말했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
이상하게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비로소 종일 나를 사로잡은 깊은 상실감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집을 잃어서도, 이웃을 잃어서도 아니었다. 우리가 정말 상실한 건 결국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고, 또 될지 몰랐던 우리 자신이었다는 뼈아픈 자각 때문이었다.
돈이면 다 되고, 부동산과 주식 자산으로 한 세대가 쪼개지는 이 시대에 좋은 이웃이 되는 일은 <홈파티>에 나온 브레히트의 문장 '선으로 향한 유혹은 얼마나 끔찍한가'를 되새기는 일이기도 하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습니까?’ 이웃을 사랑한다는 건 그저 그렇게 묻는 일이라는 게 베유의 생각이다. 오늘의 우리는 한국어로 이렇게 묻는 법을 잊어가고 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 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지만,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고, 또 될지도 모를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어서다.
비 오는 날 배달 음식을 시키지 않고, 쿠팡의 새벽배송을 주문하지 않고, 파리바게트의 피 묻은 빵을 사 먹지 않고, 스타벅스는 쳐다 보지도 않아야지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이웃에게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습니까' 를 묻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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