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시게 불완전한>>
일라이 클레어, 하은빈 옮김
저자의 전작 <<망명과 자긍심>>을 인상 깊게 본 결과, 다시금 집어든 그의 책.
그의 지인이자 다발성 경화증을 앓고 있는 한 작가가 쓴 구절에 보면서 이 책이 바로 "그 선을 넘어가면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확신하게 되는 고통의 경계선" 너머, 그 너머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픈만큼 성숙해진다지만 고통의 경계선을 넘어서서 성숙해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때 결코 견디지 못하리라 여겼던 고통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일이 누구에게라도 닥칠 수 있다. 그런 일은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왜 생기지 않았는지 생의 의미를 묻는 게 아니라 고통의 경계선 너머를 살아내야 한다. 클레어는 그 너머 계속되는 삶이 눈부실 수 있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고도 성숙하게 보여준다.
책 정리를 하면서 그의 책을 왜 읽는지 이해했다. 교차성이니 젠더퀴어니, 몸-마음 등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 스스로 그어 놓은, 결코 견디지 못하리라 여기는 존재가 된다 할지라도, 그 너머를 눈부시게 불완전하게 살아낼 마음을 얻기 위해서다. 이미 그 길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성숙을, 어쩔 수 없는 생의 불완전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받아들일 마음을 얻기 위해서다.
건강하건 아프건, 장애인이건 아니건, 모든 이에게는 상상의 경계선이, 그 선을 넘어가면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확신하게 되는 고통의 경계선이 있다. 내게도 있기 때문에 알고 있다.
돌 위에 새겨진 것과는 거리가 먼 나의 경계선은 삶이라는 모래 위에서 미세하게 움직이곤 했다. … 나는 그 어느 때보다다 더, 한 때 결코 견디지 못하리라 여겼던 그러한 여자가 되어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다. 108쪽


치유의 뉘앙스
시에라클럽의 ‘석탄을 넘어서 beyond coal' 캠페인 광고
임신부의 배에는 “이 조그만 기쁨의 장소는 이제 수은 저장소입니다." 라고 적혀 있다.” 겉보기에 이 광고들은 석탄 연소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힘을 모으자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시에라클럽은 천식과 선척적 장애, 암, 지적 장애와 같은 특정한 종류의 몸-마음의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환경적 손상의 상징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주장을 전개한다. 103쪽
시에라클럽의 수사는 장애와 만성질환을 교훈적인 이야기로 사용하는 공중보건 캠페인의 수많은 예시(음주 운전, 약물 사용, 페인트 속 납, 석면, 안전하지 않은 섹스…) 중 하나에 불과하다. 104쪽
좌절스럽게도 현재 통용되는 형식의 환경운동 메시지는 질병을 상징으로 바꾸어 버린다. 나는 만성질환과 장애의 광범위한 다중쟁점 정치 mutiple-issue politics를 끌어안는, 조금은 다른 종류의 광고를 상상해 본다. …
(다중쟁점 정치에서) 치유는 인종차별주의, 빈곤, 환경 불평등의 해체 또한 요청한다. 나는 건강과 치유가 복합적인 의미를 끌어안도록 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질문을 품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장애와 불의를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식물과 동물, 유기체와 무기물, 비인간과 인간을 막론한 모든 종류의 몸-마음을 훼손하고 바꾸어 버리는 이 불의를 목격하고, 명명하고, 그에 저항할 수 있을까? … 우리가 지금처럼 우리 자신을 사랑하면서 어떻게 몸-마음의 상실에 대해 증언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111-112쪽

2009년 이래로 매년 8월이 되면, 달리고 걷고 휠체어를 타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버몬트 벌링턴에 있는 샴플레인 호수에 모여 조이의 레이스에 참가한다. … 장애 접근성이 높은 집을 만들기 위한 기금 모금 행사가 열리는 것이다. …
조이의 레이스는 다른 장애 자선 행사들과 여러 면에서 다르다. 조이의 레이스는 치유가 아니라 접근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열린다. 연구와 직결되는 국가의 노력을 후원하기보다는 지역사회 안의 가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하나의 특정한 진단명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은 접근성에 대한 요구가 진단의 범주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 조이의 레이스는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행사에 참여하도록 청하지 않는다. 대신 즐거움과 음식, 음악을 강조한다. 160-161쪽
아프리카 수면병 트리파노소마증을 효과적으로 치료하는 에플로르니틴 : 1990년대 초 이 약(오르니딜)을 기업 인수를 통해 손에 넣은 아벤티스는 높은 제조 비용과 중앙아프리카의 빈곤, 부유한 서구 지역에 시장이 부재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아벤티스는 수익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약 제조를 중단했다. … 애플로르니틴은 2001년이 되어서야 다시 생산되기 시작했다. 에플로르니틴이 여성의 얼굴에 난 털을 8주간 효과적으로 없애준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의 일이다.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과 질레트는 에플로르니틴을 바니카라는 브랜드로 재단장한 후 미국 여성들을 대상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치유가 작동하는 법, 171쪽
천천히 천천히 그릇은 자신을 드러내요.
산산조각 났다가 다시 붙여진 모습을요.
균열, 틈, 이음매 사이로 거미줄처럼 엉클러진 문양들.
그 틈새로 쏟아지는 햇빛이 스며 나와요.
치유는 회복력과 생존을, 균열· 틈· 이음매 사이의 거미줄을 외면한다. 우리 중 망가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바로 그 점에서, 치유의 약속은 힘을 갖는다. 하지만 나는 알고 싶다. 우리의 망가져 있음을 수용하고 주장하고 포용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280-281쪽
작가가 정신 착란을 겪으며 쓴 위의 구절을 읽으며 그 답으로 '킨츠기'를 생각했다. 우리의 망가져 있음을 수용하고 주장하고 포용한다면 깨진 그릇을 이어 붙여서 만든 '킨츠키'가 되겠지. 말 그래도 눈부시게 불완전하고 찬란하게 아름다운 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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