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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링, 좋은 어른으로 자라난 이의 문학적 사회적 법적 회고록

by 불친절한 금자씨 2025. 10. 3.

요즘 소문이 자자했고 주변에서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지만, 도서관에서는 매번 '예약중'이라라 빌려볼 수는 없고  구입할지 말지 고민하다 까먹은, 출판 연식이 좀 된 책들을 발견하고 있다.

한물갔다는 말이 역사적 유물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좋은 책에도 한물갔다는 말은 통용되지 않는다. 책이란 그런 것이다. 설령 사회적 맥락이 달라져 한물 갔다해도 좋은 책의 경우 그마저 빈티지가 되드라. 물론 학습서나 자기계발서, 실용서에는 해당하지 않는 소리.

미리 찜한 도서를 검색대에서 찾는 대신, 도서관 사회과학 서가나 문학 서가를 어슬렁거린다. 반드시 예전에 끝발 날리며 도서관에서 대출 중이었던 책들이 서가에 한가하게 놓인 모습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이 책들을 읽는 즐거움이 솔찮허다. 손때가 묻고 사람들이 페이지를 접어놓고 밑줄을 그어놓은 부분들에 나도 공명한다. (물론 도서관 책에 그런 짓 하시지 마시고 인덱스 좀 사용하세요:)

그렇게 발견한 책 중 요즘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커버링>>이 책 읽고 싶어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게 만들 만큼 강력한  매력 덩어리들이었다.

사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소설이고 구례 방언이 나와 재밌을 지 예상했다. (나 구례가 고향임) 다만 얼마나 재밌고 좋은지가 내 기대치보다 훨씬 높았을 뿐.

커버링은 실은 별 기대가 없었다. 법학 교수가 쓴 사회학 책. 동성애자, 여성, 장애인의 민권을 통해 본 보편적 인권을 향한 정치적 올바름의 수사, 쯤으로 생각했다. 충분히 중요한 주제지만 대학 전공과목 수업에서 나왔던 (사회학) 어빙 고프먼의 '낙인'에서 커버링 개념을 차용하고 어쩌고. 전공 교과목 읽는 기분 정도로 생각했고, 갬동 받거나 글빨 날릴 거 같지는 않았다.

왠걸. 동성애자이자 일본계 미국인이라는 마이너리티의 정체성으로 미국 주류 사회에서 스스로를 찾아가면서 좋은 어른으로 성장한 한 사람의 문학적 회고담이 펼쳐졌다. 문학적 회고담은 수많은 소수자들이 쌓아올린 판례와 법적 정립 과정과 정반합을 일으키며, 학술서로도 문학으로서도 아름다운 책이 되었다.

실은 내게는 비슷한 부류의 책인 <<바이러스, 퀴어, 돌봄>>을 읽다가 나랑은 안 맞아 못 읽고 내려놓은 적이 있는데 커버링은 완전 다르군. 완전 내 취향이야... 폴이랑 켄지 요시노 씨 이야기는 비엘로 승화할 수도 있겠어요... (여기서 창작적 문학 갬수성으로)

다음 다소 긴, 커버링에서 밑줄 친 문장들. (숫자는 종이책 페이지 수)



커버링: 민권을 파괴하는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폭력


켄지 요시노 저자(글) · 김현경 , 한빛나 번역 · 류민희 감수

내가 교수 생활을 시작할 즈음, 동료 교수가 나를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종신 교수 자격을 받을 가능성이 더 높아질 거라며, 그가 이렇게 주의를 주었다. "만약에 당신이 전문적인 동성애자가 아니라, 동성애자인 전문가가 된다면 말이에요." 내가 동성애 주제를 연구하는 게이 교수인 것보다 "알고 보니 게이"인 주류 헌법학 교수로 사는 게 나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나는 꽤 친동성애적인 다른 환경에서도 일했는데 그곳 사람들 역시 이런 정서를 그대로 되풀이 했다. 물론  방식은 그보다 우아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게이로 살아. 원한다면 공개하고 오픈리 게이로 살아. 하지만 너무 티 내지는 마. 37

1963년에 출간된 이 책에서는(어빙 고프만, 낙인) 장애인, 노인, 비만인 등 디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손상된' 정체성을 감당하며 실아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고프먼은 패싱에 대해 논의한 후 "자신에게 찍혀 있는 낙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은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낙인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프먼은 이러한 행동을 '커버링(covering)'이라고 명명했다.

고프먼은 패싱은 개인적 특성의 가시성과 관련되는 반면, 커버링은 두드러짐과 관련되어 있다고 언급하면서 패싱과 커버링을 구분했다. 고프먼은 커버링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보좌관들이 회의를 하러 오기 전에 왜 항상 테이블 뒤에 자리를 잡고 있게 되었는지와 연관시켜 이야기했다. 누구나 루스벨트가 휠체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가 패싱을 한 것은 아니었다. 루스벨트는 커버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장애를 대수롭지 않게 보이게 해서 대통령으로서의 탁월함에 집중하게 만든 것이다. 39

이 세 단계는(전환, 패싱, 커버링) 동성애자 역사가 거친 단계이기도 했다. 개인으로서 내가 이러한 동화의 요구를 거쳐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집단의로서 동성애자 커뮤니티도 그러했다. 20

20세기 중반까지 동성애자들은 전두엽 절제술을 하든, 전기 충격 요법을 받든, 정신 분석을 받든 이성애자로 전환하라는 요구를 일상적으로 받았다. 동성애자 인권 운동이 힘을 얻으면서, 전환에 대한 요구는 점차 패싱에 대 한 요구로 넘어갔다. 이러한 변화는 1993년 군대에서 채택된 "묻지도 말하지도 마라" 정책에서 드러난다. 동성애자들이 패싱에 동의하기만 하면 군 복무를 할 수 있는 정책이었다. 마지막으로, 2000년대가 시작되면서 패싱에 대한 요구는 커버링에 대한 요구로 대제되었다. 즉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정체성을 '티 내지'만 않는다면 커밍아웃하는 것이 점차 허용되고 있다. 요즘 동성 결혼에 대한 반발은 일종의 커버링 요구로 이해할 수 있다. 좋아, 동성애자로 살아. 하지만 우리 면전에서 나대지는 마. 40

법은 문학이 범접할 수 없는 냉혹한 강제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문학은 우리 안으로 스며들어, 법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는 힘이 있다. 이 책은 두 가지 언어를 모두 사용한다. 법적 주장 뿐 아니라 나를 포함해서 순응 요구에 맞서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문학적 서사에도 기대고 있다.

우리는 미국인들의 차별 방식이 변화하는 시점에 살고 있다. 지난 세대는 집단 전체를 차별의 표적으로 삼았다. 즉 소수 인종, 여성, 동성애자, 소수 종교인, 장애가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대의 차별은 집단 전체가 아니라, 주류 규범에 동화되지 못한 그 집단의 일부를 겨냥한다. 이 새로운 형태의 차별은 소수자인 사람이 아니라 소수자의 문화를 표적으로 한다. 외부자들은 내부자들처럼 행동할 때만 받아들여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커버 링할 때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44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무조건 동화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식의 주장은 경솔하다. 언어를 사용하고 폭력적 충동을 억제하고 법을 따르는 것이 모두 동화의 행위이기도 하다. 동화는 대개 문명화의 전제 조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동화)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좁은 삶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의식 세계로 진입한다.

이 책에서 내가 반대하는 것은 이유가 뒷받침되지 않는 강제적인 동화. 즉 그 자체가 근거가 되는 재귀적인 순용 (reflexive conformity)이다. 동화를 요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 이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내 기준을 내세우기보다는 우리가 함께 이 문제를 이야기하자고 부추길 것이다.

그러나 용인할 수 없는 이유가 한 가지 있다. 바로,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에 비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기인한, 특정 집단에 대한 단순한 반감이다. 예컨대 동성애자에게 이성애자의 규범에 맞추라는 요구나. 여성에게 남성의 규범에 맞추라는 요구, 소수 인종에게 백인의 규범에 맞추라는 요구 등이 그렇다. 50-51

오늘날 미국은 평등을 해치는 방식으로 모든 외부자 집단에게 주류 규범으로의 동화를 체계적으로 강요하고 있다. 이 집단들은 강압적 커버링에 맞서 공동 전선을 펼쳐야 하며, 순응이 전제되지 않은 평등을 요구해야 한다. 51

1988년에 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동성애자 둘이 함께 자리를 뜨는 것은 용납한다. 하지만 그 다음 날 그들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잡고 다정 하게 안고 있는 것은 용서하지 못한다.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쾌락을 위해 자리를 뜨는 것이 아니라, 바로 행복하게 잠에서 깨는 것이다."
... 푸코는 동성애자가 사랑을 해도 사람들(이 책에서 나는 '일부 사람들'이라고 하겠다.)은 동성애자를 더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동성애자들이 사랑이 아닌 은밀한 관계를 갖는다면 도덕주의자들은 그 관계 역시 비천하게 그릴 것이다. 139

나는 동성애자 개개인의 커버링 수행보다는 동성재 혐오자에 의한 커버링 '요구' 에 훨씬 저항한다... 또한 나는 모든 강요된 커버링에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정당성 없이 강요된 커버링에 반대할 뿐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게는 편견으로 인한 제약 없이 모든 차원에서 정체성을 발견하거나 만들어갈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142-143

이런 이유들 때문에, 민권의 과업을 이루고자 법에서 멀어져야 할 바로 이때에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법을 향해 가고 있는것을 보면 걱정이 된다. 진짜 해결책은 시민인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지 우리 안의 아주 작은 집단인 법률가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법률가가 아닌 사람들은 법 밖에서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를 해야 한다.

우리는 고프먼의 용어인 '커버링'을 학문적 모호함에서 끄집어내어 대중적인 어휘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커버링이란 단어도 '패싱'이나 '클로짓'처럼 통용될 수 있다.

법이 커버링 요구로 인해 고통 받는 집단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커버링을 요구받는 사람들은 그 요구의 근거를 찾는 과정에서 용기를 얻어야 한다. 이러한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는 법정 밖에서 일어나야 한다. 직장에서, 식당에서, 학교에서, 운동장에서, 온라인 대화방에서, 거실에서, 광장에서, 술집에서. 이런 대화는 관용이 생성되고 소멸되기도 하는, 비공식적이고 친밀한 환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282

동화를 정당화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놓고는 분명 논란이 생길 터다. 하지만 나는 특정한 이유, 예컨대 백인 우월주의, 가부장제, 동성애 혐오, 종교적 편협성 및 장애인에 대한 적개 심과 같은 이유들은 정당하지 않다는 점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싶다.

이러한 이유들을 커버링 요구의 정당한 근거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우리의 약속을 충실히 지킬 것을 요청한다. 그 밖에도 나는 일련의 결과보다는 일련의 대화를 생성할 방법을 모색해 왔다. 어떤 이유를 어떤 목적으로 인정할 지는 서로 다른 개개인이 마주 보며 결정하게 될 터다. 나의 개인적인 성향은 항상 '깔끔한'이나 '직장에서의 조화'와 같은 이해관계보다 개인의 권리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이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