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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언 고닉, 짝 없는 여자와 도시

by 불친절한 금자씨 2025. 9. 21.

순전히 이름이 좋았다. 책도, 작가도. 비비언 고닉이라니.

우리 부모님은 사주에 '금' 이 없어서 먹고 살 재주가 없으니 금을 보강해야 한다는 할아버지 말씀에 지극히 쌍팔년도 - 이미 웹소설 주인공 이름 같은 걸로 얘들 이름 지어줬었지 -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일제시대에 나올 법한 이름을 내게  달아주셨다.

다시 비비언 고닉으로 돌아와, 비비언이라는 비비드한 느낌에 고닉이라는 고풍적이고 어딘가 유러피언 느낌의 성이 합쳐진 이름. 그래서 나는 비비언 고닉의 책을 집어들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끌리는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부터 읽기 시작했드랬다. 도시와 여자가 나오는 작품 치고 재미 없는 거 본 적이 없다. 예를 들어 '섹스앤더시티', 그리고 올리비아 랭의 <<외로운 도시>>.

비비언 고닉이 한 세대 후 태어나서 '빌리지보이스' 가 아니라 '보그'나 '엘르' 같은 패션지에 글을 썼다면, '섹스앤더시티' 의 캐리가 아니었을까.

뉴욕을 산책하며 만난 다양한 인간군과 망한 연애 이야기와 - 80대 할머니가 이렇게 솔직해서 매력적이다 싶은 게, 항문섹스 하자고 해서 삼 세판 해보긴 했는데 자기 취향은 아니라서 그 남자랑 헤어진 이야기도 여상히 펼쳐냄 - 가장 친한 남사친 게이 '레너드' 이야기가 나올 때 하릴 없이 나는 섹스앤더시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읽어야 한다, 이런 느낌이란. 비비언 고닉이라는 이름이 주는 비비드하면서도 지적이고 고상하고 뭔가 어긋난 듯한 매력이 녹아난 회고록이었다.



책 속에서

1)
한때 함께 늙어갈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친구가 있었다. 에마와 나의 우정은 몽테뉴가 그의 벗 에티엔 드 라 보에티에 대해 묘사했을 법한 종류-그러니까 영혼을 계속 정련해주는 우정까지는 아니었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몇 가지 중요한 면에서는 그런 구석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우정은 애착이었다. 영혼을 정련시키지는 않았을지언정, 영혼에 단연 넉넉한 양분이 되었기에 그야말로 긴긴 세월 서로의 존재 안에서 각자의 호기심 많은 자아를 충만하게 경험할 수 있게 해준 그런 애착. 81...

실제로 삶을 빚어내는 바탕이 되었던 공감과 연민이 차츰 깎여나가면서 우리가 우정을 바친 그 마음과 영혼의 모험도 천천히, 그러나 속수무책으로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숲의 빈터를 무자비하게 뒤덮어버리는 식물처럼 우리 사이의 간극이 우리를 덮쳤다. 그 긴 세월 나를 휘두르고 신나게 하던 우정이 순식간에 소용을 다한 것처럼 느껴졌다.... 맞네. 이거 완전 그거잖아. 관능의 열병. 84-85쪽

좋은 문장은 차고 넘치지만, 이 부분을 뽑은 것은 내게도 '관능의 열병' 을 앓게 한 우정이 있었고, 그 열병은 순식간에 소용을 다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사그라들었기 때문이다. '한때 함께 늙어갈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친구' 가,  '긴긴 세월 서로의 존재 안에서 각자의 호기심 많은 자아를 충만하게 경험할 수 있게 해준' 그런 친구가 내게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거의 연락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비비언 고닉의 문장을 씹어 삼킬 만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나이가 되어, 비비언 고닉의 정확하고도 아름다운 문장을 통해 위로 받는다. 한때 애착의 대상이었던 친구라는 실물이 아니라 그것을 문장으로 박제해놓은 책이 내 친구가 되었다.

2)
매니는 오랜 혼란과 우울을 견디고 살아남은 사람이었는데, 그가 써먹은 방법은 끝내 도무지 알 수 없었던 미래에 완전히 대비한 자기 자신을 상상해보는 것이었다. 그건 곧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만 벌며 매사 가장자리에 남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여전히 인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그는 모든 걸 싼값에 해결했다. 123쪽

한번 불꽃 튀게 치고받고 나면 나는 매니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렸다. 한참을 그렇게 무거운 짐짝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러면 매니가 두 팔로 나를 감싸 안았다. 내 머리칼을 그토록 정료한 부드러움으로 쓸어 넘어주던 섬세한 손길이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가진 걸 다 탕진하는 중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머지않아 시간을 벌 수단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이었다.  129쪽

이렇게 현실의 사람을 정의하고, 꺼져가는 사랑의 순간을 묘사한 책이 있다. 책이 있는 세상은 짝 없는 여자가 외로운 도시에서 무사히 오래 오래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다. 물론 짝 있는 여자가 한갓진 시골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