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가 대단하긴 하다. 자기계발서 분야의 탈을 쓰고서 기어이,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자신도 잘 대접하는 법을 녹여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이메일을 살짝 다르게 쓰게 되었고, 살짝 더 다정한 마음이 되었다. 이러한 태도가 쌓여 인생을 바꿀 수 있겠지, 그러니 책 제목은 과장이 아닌 셈이다. 앞서 자기계발서 분야의 탈을 썼다 했는데, 정정해야겠다. 내 이메일 쓰기를 조금이나마 낫게 해주었으니 자기계발서의 본분에도 충실하다.
이런 자기 계발서라면 에세이고 문학이라고 할 수 있고 얼마든지 자기계발서를 읽고 싶다. 스스로 한 장르가 되어버린 이슬아 작가답게, 새로운 장르의 책을 선보였다. 읽는 즐거움과 자기 계발을 동시에 해버리는 이 매력적인 책의 내용을 공유한다. 이야먈로 자기계발서에 대한 문학 작가로서의 앙금을 풀어내는 '꽃수레' 권법 아닌가.
재주를 한껏 부리며 쓴 책으로, 그간 새침하게 대해온 자기 계발서 매대에 가려고 했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무한성장주의를 숨길 생각조차 없는 그 매대에 나는 자주 질려버리곤 했다.
무슨 책이든 간에 어떻게 남들보다 더 가질 것인지로 귀결되는 시장을 지독하게 놀리고 싶었다. 문학이 받는 사랑의 수십 배를 자기 계발서가 받았기 때문이다. 문학의 소비자이자 생산자로서 나는 앙금이 있었던 것 같다. 273
책 목차 제목도 어쩜 이렇게 잘 뽑았는지. 책에도 등장한 책 편집자의 실력이겠지? 목차만 훑어봐도 읽는 맛이 느껴진다.
인생을 바꾸는 이메일 쓰기 (본문 인용, 문단 뒤 숫자는 종이책 인용 페이지)

세계는 신의 주사위 놀이처럼 불공평하고 인류의 미래는 그닥 밝지 않을 전망이다. 허나 우리는 기후위기 빰치게 걱정스러운 이메일을 써낼 수도 있는 존재이고 멸종위기에 처한 친절과 낭만과 유머를 되살릴 수도 있는 존재다. 11
나는 늘 이런 것들이 궁금했다. 내 실속을 챙기면서도 무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상냥하면서도 얕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 돈 더 달라는 말을 어떻게 해야 비굴하지 않을까? 거절하면서도 상처 주지 않을 수 있을까? 싸우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을까? 13
우리는 이메일로 인생을 바꾸기로 했다. 상사에게 혼나지 않는 이메일이랄지 무난한 이메일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무려 이메일로 팔자를 고치겠다고 했다. 그러려면 한 방이 있어야 한다. 미지근한 상대의 가슴에 투명하고도 뜨끈한 편지를 꽂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연유로 제목의 기본기는 딱 두 줄로만 갈무리하겠다. 77
1. 정중하되 비굴하지 않을 것.
2. 일목요연하되 무례하지 않을 것.
이제 눈치챘을 것이다. 좋은 제목을 쓰려면 역시 읽는 자를 좀 좋아해야 한다는 사실을. 수신자를 알려고 노력하는 게 먼저다.
내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는 원고료 선입금 제도를 실천하고 있다, 작가가 원고 청탁을 수락하면 24시간 내로 고료를 송금한다. 글을 아직 한 자도 안 썼는데 왜 벌써 돈을 주냐고? 우리는 배달음식이 오기 전에도 먼저 돈을 낸다. 94
내마금지
내용과 분량,
마감기한,
금액,
지급일,
이를 반영하여 업무 청탁 메일을 쓸 것 95
이때 나는 상대의 상한선을 모른다. 상대가 얼만큼 힘써줄 수 있는지 모르는 채로, 어딘지 모를 상한선을 향해, 바로 그 금액을 향해 같이 가지고 제안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내 작업료를 최대로 올리며 일을 해왔다. 다른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부담을 주는 방식이었다. 돈에 마띵히 걸맞은 결과물을 납품해야 했으니까. 그러나 역량은 이런 식으로 쑥쑥 자라기도 한다. 기세 있게 돈을 협상하면서, 내 호연장담을 책임지면서, 돈 주는 이들의 기대를 어떻게든 충족시키려 용쓰면서, 어느새 꽤나 능숙해지고 탁월해져버린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마는 것이다. 그게 바로...... 프로의 인생이다. 109
(진짜 이 애티튜드에서, 프로의 향기를 맡아버렸다.... 호연기개가 대단한 이슬아 님이었던 것이다....)
꽃수레 권법은 꽤 어렵다. 그러나 잘해낸다면 무척 아름다울 것이다. 험한 세상으 모든 일들을 꽃수레 권법으로 무찌를 수는 없겠지만 날 선 대화를 꽤나 부드럽고 유머러스하게 승화히기엔 충분하다. 할말을 똑부러지게 하면서도 다시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이 기술은 물론 상대에 대한 너그러운 애정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지겹지만 또다시, 상대를 조금은 좋아해야 한다는 진부하고도 거룩한 결론에 다다르고야 마는 것이다. 213
잘못한 사람인 채로, 그걸 스스로도 너무 잘 아는 채로 자기 자신을 견디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인다. 만약 오늘 당신이 한심한 실수를 하고, 사과 메일을 쓰고, 수습하느라 진이 다 빠지는 하루를 보냈다면 저녁엔 당신 옆에 그 고생을 들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실수를 그의 옆에서 뼈아프게 곱씹는 동안 당신이 기억했으면 좋겠다.
다음, 그리고 또 다음이 있다는 것을. 223
(나 F도 아닌데 여기 읽으면서 울고 있니?)
곧 잠에서 깨어날 너에게 (현재 파트너 이훤 님 에피소드에 나오는 이메일 중)
초고에 앉아 강지아 시인의 시집을 읽었어. 여름을 지나 겨울을 향해 가는 지금,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이 시집에 적혀 있었어.
여름 샐러드를 먹으면서
흰 눈이 쌓인 운동장을 함께 달리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고, 또 있었더라도
우린 앞으로 잘 달릴 수 있다,
그런 믿음은 이상하게도 잘
사라지지 않는다.
강지아 시집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 시인의 말 248
사람은 기술이 있어야 된다고 할아버지는 늘상 말했다... 언뜻 작가의 기술은 실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살면 살수록 문장이 또한 인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막힌 배수관을 뚫는 수리공처럼, 없던 경사로를 뚝딱 짓는 목수처럼, 누군가에게 전수할 수 있는 유용한 기술이 내게도 있는 것 같았다.
'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먹고, 싸고, 죽고 Eat Poop Die (2) | 2025.09.04 |
|---|---|
| 바다의 천재들, 말 그대로 천재였어! (7) | 2025.08.28 |
| 오래 살아야지, 다짐하게 하는 <<애도하는 게 일입니다>> (4) | 2025.06.12 |
| 이반지하의 공간 침투 (3) | 2025.06.08 |
| 잘 키우고 싶어서 아이와 여행하는 중입니다 (3) | 2025.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