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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살아야지, 다짐하게 하는 <<애도하는 게 일입니다>>

by 불친절한 금자씨 2025. 6. 12.

 

김민석 작가는 '이토록 사소한 것들' 영화 시사회의 이야기 손님으로 나왔을 때 처음 알게 되었다. 서울시의 무연고 사망자 장례를 주관하는 '나눔과나눔'에서 일한다는 것도, 나눔과나눔의 존재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시사회에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내용이 좋아 그가 썼다는 책을 찾아보게 되었다는 혼자만의 인연.

영화를 저렇게 풀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죽음과 애도를 쓴다면... 그래서 읽기 시작했는데, 읽고 나서 다짐하게 되었다. 기필코 오래 오래 장수해야겠다! 내 뜻대로 죽고 싶다면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 

내가 120살까지 살고 싶은 이유는 이미 <<우리, 나이 드는 존재>>라는 책에 구구절절 주저리 주저리 썰을 풀었다. 그런데 그때는 몰랐던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상조회사가 가족 대신 본인들이 장례를 치러 줄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기다. 셀프 장례는 불가능하며, 사전장례의향서를 작성해도 법적인 구속력을 가지지 못한다." 167p  "자기결정권은 생전에만 유효하다. 상속을 제외하면, 자신의 의사를 죽음 이후에 존중받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170p 

내가 원하는 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장례를 치러줄 사람을 지정한다고 해도, 가족이 아닌 이가 장례를 치르려면 우선 내가 무연고 사망자가 되어야 한다. 장례를 치를 가족이 있다면 가족에게 결정권이 넘어간다.  

가족에 포함되는 범위는 배우자, 직계비속, 직계존속, 자녀를 제외한 직계비속, 부모를 제외한 직계존속, 형제자매 (조카는 포함되지 않음) 까지이다. 즉 직계비속이 없는 나의 경우 윗세대인 친계존속과 또래 세대인 형제자매가 내 장례를 주관하게 된다. 그래서 다짐했던 것이지 ㅎㅎ 부모님보다 오래 살고 울오빠보다 오래 살아야겠구나. 죽어서도 자기 결정권을 갖고 싶다는 욕심이 만수무강으로 귀결되어버리네. 

다양한 사람의 삶과 애도의 의미, 무연고 사망자와 공동체의 역할을 고민하게 만든 책인데, 실제 실무를 하는 작각가 쓴 만큼 스토리 하나 하나마다 죄다 사연을 담고 있다. 개인적 사연을 통해 종내 사회적 애도를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수작이다. 

  

책 중에서 

안타깝게도, 이렇게 연고자가 시신 인수를 거부 또는 기피하는 경우는 전체 무연고사망자통계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20p

장례의뢰 공문으로는 고인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제적등본, 가족관계증명서, 혼인관계증명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관계가 얼마나 많은지, 그렇게 외로운 사람으로 기록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 나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을 놓치고, 얼마나 많은 이들을 오해하게 될까?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을 외로웠다 단정 짓게 될까? 36p

어린이 병원에는 어린 시절에 입원했다가 가족과 연락이 끊겨서 퇴원하지 못하는 중년의 행려환자가 종종 있다. 병원은 그런 환자들을 내쫓을 수 없으니 병동에서 계속 돌볼 수밖에 없고, 호전될 수 없는 병이나 장애를 가지고 있는 환자는 결국 병원 밖의 세상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둔다. 물론 어린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이들 중 무연고사망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 아이들 역시 대부분은 병원에서 평생을 보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44p

"건강하게 살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아프니까 다 가족을 찾아, 병원도, 장례식장도요." 50p  흠... 바로 생활동반자 법이 필요한 강력한 이유다. 아주 자유로운 리버럴이라 '가족주의'나 '동성혼'에 반대한다 해도, 나를 지켜주었던 사람들을 가족으로 세워놓지 않는다면 병원과 장례식장에서 그들이 나를 지켜줄 수 없게 되니까.  

(이주노동자) 고인의 어머니가 작성한 시신처리위임서의 위임 사유가 잊히지 않는다. "가족이 매우 가난하고 어려운 상태이기 때문에 인계가 불가능합니다. 가능하다면, 아들의 얼굴 사진을 찍어주십시오. 꼭 좀 부탁드립니다." ... 어쩌면 우리가 삶에서 누리는 풍족함은, 고된 타향살이를 무릅쓴 이들의 삶을 게걸스레 집어삼키는 비정한 착취 구조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 값을 지불해야 함에도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 93p

마지막 순간에는 아기가 사회로부터 버림받지 않을 수 있게 안전망이 작동한 것이다. 개중에는 수의를 입을 수 없는 아기를 위해 직접 수를 놓은 배냇저고리를 보내 주는 시민도 있었는데, 그 저고리에는 짤막한 인사말이 적혀 있었다. "아가야, 안녕. 우리가 사랑해." 107p 이런 어른이라니... 

더 이상 아이들이 죽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나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알고 있다. 분노는 잠시 타오르다 휘발되고 만다는 것을. 분노는 시스템을 바꾸지 못하고 사건 자체를 잊게 만든다는 것을. 108p

2020년에 보건복지부의 <장사 업무 안내>에 장례주관자와 ‘아목’에 해당하는 연고자에 대한 항목이 생겼다. 사무실에서 우리는 쾌재를 불렀다. 지침의 내용을 살펴보니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어쨌든 어르신들의 장례를 우리가 치를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당 지침을 근거로 서울시의 무연고사망자 업무 매뉴얼을 새로 작성했다. 그 매뉴얼에서는 ‘가족 대신 장례’라는 전에 없던 챕터가 추가되었다. 153p

시신의 안치, 염습, 입관, 운구는 당연히 장례식장과 전문 상조회사들의 영역이다. 그러나 애도는 그렇지 않다. 애도는 온전히 사별자의 것이다. 우리의 삶과 죽음은 저마다 다르고, 이별의 방식도 그렇다. 애도에 틀린 방법은 없다. 20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