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dit

이반지하의 공간 침투

by 불친절한 금자씨 2025. 6. 8.

출처 https://www.instagram.com/ibanjiha_official/

 

일하거나 공부하려고 읽는 책 말고, 순수히 읽는 맛 덕택에 보는 책을 만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토록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널려있는데도 동시에 글 읽는 맛으로만도 시간이 아깝지 않은 저자를 만나기란 의외로 일년에 3~4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건 뭐 개그코드가 맞아 남들 다 안 웃어도 둘만 킥킥대면서 웃고 있는 애인 짬밥 같은 거다. 내게는 이반지하 님의 글이 그렇다는 거.

'니 글이 읽고 싶긴 하다'라는 책 속 이반지하 님 친구의 말처럼 나도 '압지'의 글을 오래도록 읽고 싶다. 이토록 적절한 비유와 정확한 단어를 능수능란하게, 능청스럽게 눙치면서 웃픈 정치적 글쓰기를 하는 작가는 흔치 않으니까.

 

출판사 '창비'의 책소개

각종 매체를 넘나드는 현대미술가이자 퀴어로서 분투하는 글쓰기를 선보이며 독보적 영역을 확보한 작가 이반지하의 세번째 단독 저서 『이반지하의 공간 침투』가 출간되었다. 특유의 유머와 통찰이 담긴 퍼포먼스, 끊임없이 정상사회와 대결하는 예술행동으로 행보마다 주목을 모으는 그가 이번에는 ‘공간’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아무리 벗어나고 뛰쳐나와도 우리는 여전히 ‘공간’ 안에 있지만, 어떤 이들은 끊임없이 그곳에서 배제된다. 나쁜 장애인은 지하철을 박탈당한다. 성소수자 청소년은 학교를 박탈당하며 평범한 시민조차 공공도서관을 박탈당한다. ‘빈곤의 공간’과 ‘공간의 빈곤’이 만연한 사회에서 예술가 이반지하는 어떻게 자신만의 공간을 창출해왔을까.

서울시의회, 도서관, 대중교통 같은 공공의 공간부터 편의점, 스타벅스, 압구정 부촌의 목욕탕, 웨딩홀 등 사적 일상이 와글거리는 공간까지. 한껏 그를 밀어냈지만 결국은 예술가 이반지하에게 다시금 점거당할 수밖에 없었던, 오히려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사회의 구석구석을 말한다.

세상의 모든 ‘공간 상실자’들에게는 위안과 웃음, 용기를 전하는 한편, 우리가 박탈당한 공간을 특유의 신랄하고 자유분방한 문체와 삽화로 점거하고 재창출해버린다. ’퀴어 예술가‘이자 ’노동자‘로서 공간 속에 녹아들고 어느새 침투해버리는 자, 공간 빈곤과 차별의 세계에서 날카로운 생존자로 활약하고 어떻게든 침투하는 자, 이반지하의 치열한 자기이론적(autotheory) 기록이 여기에 있다. 


 

밑줄 그은 문장 

내용도 내용이지만 "상대가 외면하려는 부분을 굳이 열어젖히는 것은 타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나. 이런 게 가정교육의 문제, 그런 거 아닌가." / "이런 건 뭐 마누라가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표현 ㅋㅋ

병원에서, 몸뚱아리

하지만 이런 대단하신 마음도 목을 굽힐 수 없는 정도로 닳아버린 경추 앞에 서면, 늦어도 너무 늦은 이 순간일지라도 한컴타자연습분께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작품에 개입하는 각종 도구와 재료 중, 뼈와 살이 든 몸뚱이가 가장 큰 변수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29쪽

환자라는 입장이 여러 의미에서 실례를 용인받을 수 있기 때문일까. 이곳 사람들은 들숨에 방귀를, 날숨에 트림을 텄다. 100쪽

 

목포항 근처 편의점에서

분명 가장 자극적인 단어들을 골라 헤드라인을 잡았겠으나 부드러운 회색 종이에 스며든 검은 잉크는 내 눈을 뽑을 듯이 깊게 파고 들어오지 못한다. 

특검… 

소리내어 읽으면 ㅌ소리가 주는 선언적 자극이 있지만 그래봤자 ‘콘돔’은 커녕 ‘판콜’ 도 이길 수 없다…. 154쪽

 

쓰레기 봉투를 하나씩 접기 위해서는 전체를 묶고 있는 스티커를 먼저 제거해야 하는데, 이걸 떼는 맛이 아이폰 언박싱의 그 맛이다. 157

 

서울시의회에서

이때 알게 된 나쁜 성소수의 특징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 말이 많다는 것이 가장 악독한 부분이었다. 점거 농성후 빛나는 성과를 맞이한 나쁜 성소수 우두머리들은 번갈아 마이크를 쥐고 존나, 존자 길게 좋은 말을 이어갔다. 이들은 언제나 그렇듯 이런 자리에 공연 하나쯤 있어야지, 라는 생각만 할 줄 알았지 공연자를 인간 같은 걸로 생각하지 않았다… 사각 팬티 밑으로 뻗어나온 다리는 성능 좋은 바이브레이터처럼 쉬지 않고 덜덜거렸다. 210쪽 

2011년 처음으로 대놓고 ‘성소수’ 의 이름으로 본격 단체 행동을 해본 애들이었기에, 3년 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서울시청 점거도 결의할 수 있지 않았나,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학생인권조례 폐지가 뼈아프게 다가온다. 만들기는 너무 어렵고 품이 들지만, 없애는 일은 어쩜 이토록 산뜻하도록 순식간인지. 

그러니 성소수는 필히 앞으로 더 나빠져야 할 것이다. 나쁜 성소수는 어디든 가야만 할 것이다. 나쁜 장애인과 나쁜 성소수가 판을 쳐야 진짜 나쁘고 비린 것들이 비로소 숨겨왔던 자기소개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215쪽 

 

진짜 웨딩홀에서 (부산 헤테로 결혼식 사회...)

지금 이순간만큼은 눈앞으로 다가와버린 헤테로 결혼식 사회에 일단 집중해보자. 성소수들은, 음, 일단 기다려보라. 일단 돈을 벌고 있어보라. 256쪽

분명 그렇게까지 품이 드는 행사는 아니었는데, 큰 나사 하나가 풀린 것처럼 정신이 헤롱대고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쌓인 피로의 무게를 이고지고, 마침내 서울에 도착하자, 이래서 퀴어퍼레이드를 반대하는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 그들의 규칙, 문화를 보고 겪는 것은 이토록 피곤한 일이니까. 274

꼭 필요하거나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아니지만, 없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인식할 수 있었다. 아, 차별은 나쁜 것이다. 

근데 결혼식까지 할 돈은 대체 어떻게 버는 것일까. 277쪽 

 

근데 이 책이 환경 블로그에 왜 실렸냐고 물으신다면, 이반지하 님이 책에서 대기업 도시락 배달 받아서 일회용품 척척 플라스틱 탑 쌓아 내다버리는 일상을 공개했지만 동시에 알맹상점에서 오셔서 조신하게 하나하나 리필해서 장 보시는 VIP 단골이라는 거... 아니 걍 내가 이 책 너무 좋아서 소개.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