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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노동윤리와 노동 주체의 탄생, 그리고 좋은 삶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7. 4. 23.

노동 사회학자도아니고 노동운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이런 책들에 눈에 간다. 어떻게 일하고 살 것인가, 를 다룬 책들.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처럼 일 못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어떻게 하나요, 팀장이 되었어요'나 '기획서 잘 쓰기' 같은 직무 능력 향상도 아닌, 이미 변해버린 시대에 우리 스스로가 개척해야 할 노동과 삶의 윤리학 같은 거. 특히 비참한 비정규 노동을 포함해 자발적으로 '9 to 6'의 노동을 벗어던지고 불안정한 삶의 영역에 들어선 새로운 세대의 일과 삶을 고민하는 글이 눈을 끈다. 

나야말로 지금의 정규직 활동가 삶을 벗어나고 싶지만 이 밤톨만한 안정감과 월급을 포기하지 못해 책으로 대리만족하는 걸까, 자문하다 얻은 답은 이렇다. 나는 보수적이라, '9 to 6'라는 일상의 리듬감과 안정감을 퍽이나 사랑하며, 논문이든 회사 업무든 돌봄이든 애정을 갖고 진득하니 하는 것이 최고라 믿는 '엉덩이이로 뭉갠 시간'파다. 스스로의 재량과 외부 사정에 따라 노동공간과 시간과 업무가 가변적인, 때로는 일과 일상이 섞이는, 대신 자유롭고 창의적이고 의지적인 일을 감당할 깜냥이 안 된다. 그렇지만 좋든 싫든 세상은 변했고, 한 가지 일의 정체성이나 하루 종일 매여 있는 직장에 만족하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의 일 찾기가 이미 시작됐다. 무엇보다 상근 활동가를 더 할 수 없는 나이가 돼서도 여전히 현장에서 늙고 싶은 내가 적응해야 할 노동조건이기도 하다. 


먼저 잘 나가는 다국적 컨설팅 회사를 박차고 나와 협동조합을 꾸려 만나고 이야기하고 글 쓰는 삶을 택한 제현주 님의 책들. 




“(우리가) 전환점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탈-일자리(dejobbing), 즉 고정된 일터의 종말이다. 이것이 활동으로서의 일이 끝났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의 전환은 능동적 자유의 측면에서 폭넓은 장을 열어준다. 그러나 불안정성의 내생성 탓에 사람들이 치러야 하는 비용도 있다. 각각이 일종의 ‘일의 포트폴리오’를 관리하고, 일하는 삶 전체에 걸쳐 그 포트폴리오를 최적화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고정된 일자리는 소외를 일으켰지만 안정성은 주었다. 반면, 일의 포트폴리오는 각 주체의 재능, 심지어 숨겨진 재능에까지 가치를 부여해지지만 불안정성을 일으킨다." 67쪽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하면서도 거리두기’다. … 사랑의 상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듯, 일이 놓인 조건을 직시해야 한다. 일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큰일날 것 같은 집착 또한 버려야 한다. ... 언제고 떠날지 모르니, 발을 반쯤만 걸친 태도도 답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일이 주는 최고의 재미를 맛보지 못한다. 마음껏 사랑할 것, 그러나 객관성을 잃지 않을 것, 그 일이 아니더라도 어디서건 의미 있는 일을 또 찾을 수 있다고 믿을 것, 일의 성패가 당신의 가치를 말한다고 착각하지 않을 것, 건강한 연애에 대한 모든 원칙을 그대로 적용해도 크게 틀릴 구석이 없다." 32쪽


"우리는 일이 없는 삶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을 너무 많이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지만 일과 내 삶을 동일시하고 싶진 않다. 우리는 좋은 사람들과 일하고 싶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와 모든 것을 나누고 싶진 않다. 우리는 놀듯이 일하고 싶지만 놀이 대신 일을 하고 싶진 않다. 이 사이 어디쯤에서 내가 원하는 일의 방식을 규정하는 것, 자신에게 좋은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 그것이 일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행복해지는 방법이다." 36쪽 



위의 책이 구체적인 저자의 경험에 기대 안내하는 조근조근한 책이라면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는 탈노동과 페미니즘에 기반해 이 시대의 노동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담론이다. 


"일의 문제는 일이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독식한다는 데만 있지 않다. 문제는 일이 사회적 정치적 상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데까지 미친다. 임금노동 바깥의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우리는 어떻게 이름 붙일 수 있을까? 그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길 소망할 수 있을까? 사회 구성원 서로에 대한 의무의 내용과 조건을 일이라는 화폐 체계 밖에서 파악할 방법이 있을까?" 63쪽


"노동거부가 오늘날의 노동 현실에 제기하는 도전은 페미니즘의 의제와 관심사와 최소한 상통한다는 것이다. 여성을 위해 더 나은 일을 요구했던 페미니즘의 주장은 중요한 것이었지만, 여성에게 전체로 보아 더 많은 일을 안기는 결과를 낳았다. ... 노동거부의 페미니즘 버전은 가정의 관점에서 일을, 또는 일의 관점에서 가정을 비판하기보다는 일과 가정 모두를 거부의 대상이자 장소로 아우른다. 이런 보다 광범위한 거부의 기획은 반노동 비판과 탈노동 상상 양쪽에 도전을 제기한다. … 즉 무급 재생산노동의 조직화와 임금노동과 맺는 관계를 완전히 새로 사유해야 한다." 177~178쪽 


“'우리는 매점도, 보육시설과 세탁기, 식기세척기도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권을 원하기도 한다. 우리가 원할 때 소수의 사람들과 사적으로 식사하는 것, 아이들과 어르신들과 아픈 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언제 어디에서 할지 선택할 수 있기를 원한다.' 선택권을 가지려면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시간을 갖는 것’은 적게 일하는 것을 뜻한다." 199~200쪽 


"페미니즘의 시간 운동은 사람들이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할 시간을 만드는 것을 넘어, 사람들이 가족의 형태와 기능, 노동 분업의 지배적 이상과는 다른 대안을 상상하고 탐구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265쪽 ... (이는) 새로운 주체성, 새로운 노동과 비노동의 윤리, 돌봄과 사회성의 새로운 실천을 구성할 공간을 창조할 시간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271쪽 


좋든 싫든 20세기 이후의 역사를 흔들고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정치적 이론과 실천 중 하나가 페미니즘이라는 사실을 그 누가 부정할 수 있으랴. '페미니즘X노동'을 다루는 이 책은 근본적으로 세상을 뒤엎는 페미니즘의 이론적 깊이와 실천력을 보여주는 증거다.  



 

제현주 님의 글이 노동경력이 좀 있는 20대 후반~30대 이후의 노동과 삶을 다루고 있다면 이영롱 님의 책은 그보다 좀더 젊은 사회 초년생들, 특히 자유롭고 대안적인 노동을 찾아나선 신세대의 노동경험을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제 3섹터의 관리직 자리에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대안적인 삶을 사는 노동자이자 좋은 상사가 되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가슴 쓰리게 읽었다. <<사표의 이유>>를 젊은 활동가들과 읽고 이야기했는데 다들 한 마음, 한 처지인 거 같아 (플랜비에서 다루는 바로 그 시츄에이션) 나 먼저 다른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반성했드랬다. 나는 이제 조직의 문제에 책임이 있고 이 문제를 풀 일정 권한과 의무를 가진 사람이자 직책을 가지고 있다. '중년은 처음입니다만,' 어느새 그 나이가 되었네 그랴.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놓지 않을 것, 청년 세대의 사회적 노동에 대한 답을 함께 고민할 것, 그것 먼저.


페미니스트 칼럼니스트 코트니 마틴(Courtney E. Martin)도 2016년 테드에서 '잘 사는 삶'에 대해 강의했는데, 당연히 어떻게 노동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결국 이 많은 노동 이야기는 '잘 사는 삶'에 대한 정의가 뒤집히기 시작했는데도, 여전히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일하는' 삶을 좋은 삶으로 여기고 그렇게 세팅된 사회적 관습과 마찰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불공평한 일자리 기회, 불공평한 자원의 배분, 불공평한 환경 오염의 결과를 온몸으로 떠맡은 신세대가 가장 격렬하게 앓는 문제가 되었다. 그나저나 코트니 마틴의 이전 테드 '엄마의 페미니즘을 넘어, 다시 페미니즘' 강연을 추천한다. (This isn't her mother's feminism) 

https://www.ted.com/talks/courtney_martin_reinventing_feminism?utm_source=tedcomshare&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tedspread




평생 일하고 싶다, 는 '노동 중독' 마인드의 소유자지만 그건 내 취향이고 ㅋㅋ 더 좋은 노동, 더 좋은 삶을 나 혼자 말고 지금 여기, 내가 일 하는 곳에서 함께 해나가고 싶다. 이 무슨 결기냐고? 내일 서울시 청년허브 3인의 혁신 활동가가 첫 출근한단 말이지. ㅋㅋㅋ (아, 무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