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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치일까?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7. 8. 7.




사랑은 사치일까: 여유 없는 일상에서 자꾸만 감정이 생기는 당신에게

벨 훅스 저, 양지하 역


언젠가부터 사랑이니, 섹스니, 잠자리니, 남자니, 감정이니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종합 비타민제니, 오메가 쓰리니, 목 디스크니, 도수치료니 이런 이야기를 한다. (플러스: "걔네는 도대체 왜 그러니?"라는 어린 것들 뒷다마 까는 꼰대 대화) 슬쩍 동향을 보니 나보다 한 연배 위인 386 세대는 믿고 부모님을 모실 수 있는 요양원 정보가 대화의 중심. 이미 충만한 관계에 안착한 사람은 바로 그래서, 이미 속을 파헤쳐놓는 사랑의 상처에 지긋지긋하게 데인 사람은 바로 그렇기에, 젊지 않은 우리는 더 이상 사랑 이야기를 안 한다. 벨 훅스의 사랑에 대한 페미니즘 책을 이토록 늦게 집은 든 까닭이다.  


벨 훅스는 15년 간 함께 한 남자 파트너와의 관계를 정리하면서 왜 여자들이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고 정서적으로 교감하지 못하면서도 관습적 관계에 계속 매달리는지, 페미니즘이 권력을 대해 말하고 사랑에 대해 말하지 않는 동안 수많은 연애 자기계발서가 사랑과 친밀성에 대한 삶의 기술이 아니라 관계를 작동하고 유지시키는 전략만을 여자들에게 가르치는지 콕콕 찍는다. 사랑, 페미니즘, 여성, 몸, 동성애, 보스턴 결혼, 가부장제를 관통해 여성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면서도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을 위한 페미니스트의 조곤조곤한 지혜들.

 

"만약 페미니스트들이 계속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더라면 지배의 중심에 굳건히 자리 잡은 사랑 없음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새로 얻은 평등권, 일자리, , 그리고 권력에서 더 나아가, 다른 지배 권력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제 역시 남녀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실패했음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우리는 진정한 남녀 간의 사랑은 양쪽 모두 성적 문제에서 가부장적 사고에 도전하고 바꾸려 할 때에만 가능함을 모두에게 거듭 상기시켜야 했다. … 아버지, 형제, 남성 동료 혹은 연인 들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상처를 주면서도 우리를 사랑한다고 믿게 허락해서는 안 된다." 105쪽


"사랑을 알고자 열망하는 여성들이 관계나 로맨스에 관한 한 선택의 여지 없이 관습적 사고방식으로 회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혹여 실패할지라도 그들은 그 방식이 주는 최소한의 가능성과 약속에 매달린다. 지금 우리는 누구도 사랑에 가치를 두지 않는 나라에, 여성이 권력의 정치를 위해 사랑의 정치를 피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106쪽 


초등학교 때 못 참고 교실에서 오줌을 싼 것처럼 (진짜 그랬다는 건 아님 ㅋㅋ) 기억에서 불살라 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일들은 거의 대부분, 연애할 때 터졌다. 스스로를 부정하고 싶을 만큼 쪽 팔리고 자기 자신을 밑바닥까지 탈탈 털어보이도록 만드는 연애의 일화들, 그리고 '똥파리'에 불과했던 인간적으로 찌질한 것들을 미친듯 사랑했던 시간들. 어찌어찌 그것을 건너왔는데 나는 침묵하고야 말았다. 연애야말로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지름길이었고, 자신을 알게 된 여자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찾는데 페미니즘 만큼 간절하게 도움이 되는 밑감이 없다는 것을. 



나는 너를 만나 조금씩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어. 그런데 감히 페미니즘을 몰랐다면 나는 너를 만나지 못했을 거야. 서른의 외롭고 소외된 느낌을 견디지 못한 채 관습적인 관계에 결국 안주했을 거야. 찰나적이고 안정적인 느낌에 단말마의 행복을 느끼며, 이것이 사랑이고 이것이 관계의 최선이고, 더 바라는 내가 욕심이 많다고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말이야. 


내가 살던 시대에 나이 든 여자들은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 자기 자신으로 살며 생존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젊은 여자들에게 별로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만약 그랬더라면 아무리 동화 속 왕자가 멋져 보여도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첫 탐색은 그들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을 함을 알았을 것이다.” 274쪽

"사랑할 줄 아는 남자를 찾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남자는 사랑하지 않는 대신 가부장제가 가져다 준 보상과 권력의 형태에 연연한다. 가부장제는 남성들이 스스로를 사랑하게 하지 못하게 하고 온전한 자신을 부인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상처 입힌다. 그러므로 사랑을 알고자 하는 남성들 역시 가부장제에 저항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저항을 시도하는 남자들일 분명히 있으며, 여성들은 그런 남성을 찾고 있다." 220쪽  

 

문제는 남자라는 인종이 자연선택을 포기하고 퇴화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사랑을 알고자 하는 남성들이  아주 소수라는 것, 그리고 눈 밝은 여자들이 그들을 빨리 선택한다는 것. (이효리의 남자 이상순을 보라.) 그럼에도 벨 훅스는 사랑과 관계를 포기하지 말 것을, 사랑 없이 버티는 삶을 살지 말 것을 당부한다. 


"지금은 심지어 불행한 결혼 생활에 갇힌 이조차 적어도 자신에게 출구가 있다는 사실을, 결혼이라는 관계와 제도 바깥에 자신을 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다행이다. … 변화를 선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여성에게 어떤 모델이 존재한다는 건 정말로 중요하다. 오늘날 여성들이 양쪽 성에서 자유롭게 파트너를 고른다는 사실은 젊은 여성들이 성적으로든 아니든 사랑에 대해 알고자 하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이들과 서로 경험을 나눌 수 있다는 뜻이다." 31쪽   

  

함께 늙어가는 내 친구에게 이 책을 선물하기로 한다. 이십 대의 우리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남자들을 금붕어 똥만큼 한심하게 여기고, 동성애를 궁금해하고, 밤 새워 학내 성폭력 사건 대자보를 쓰고, 엄마와 '정상가족'에 학을떼고, 결혼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 여겼다. 가끔 수업을 빼먹고 여성주의 교지 동아리나 총여학생위원회 방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외롭지 않았었지.


삼십 대를 넘어가며 각자의 삶에 치인 외롭고 쓸쓸해진 친구들이 결혼을 갈구하고, 이민을 가고, 이상한 관계를 용인하고, 행복하지 않은 관계를 견뎠다. 일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으니까. 격동의 삼십 대 중반 이후 연애니, 관계니, 감정이니 묻어 두고 이제는 건강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랑받고 사랑하는 친밀감은 인생의 사치가 아니다. 꼭 배타적인 이성애 관계가 아니라 해도. (나는 배타적인 로맨스 관계를 선호하고 그게 사랑을 유지하는 기장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니까 우리는 더 많이, 더 자주 페미니즘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뭔가 이 가부장적 세계에서 사랑에 대해 희망이라고는 없는 것 같지만, 늙어가면서 더 멋진 일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은 충분히 희망적이다. 나 역시 '똥파리'와의 연애에 인생을 매달고 남의 눈에 들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던 바보같고 불안정하던 이십 대보다 좀더 자신을 알게 됐던 삼십 대가 훨씬 좋았고, 올해 처음 맞는 마흔도 여전히 좋다. 그런데 마흔 후반과 오십 대는 더 좋다는 거잖아! 올레!!

   

"요즘 나는 매일 여자들에게 사랑과 나이 듦에 관해 이야기 한다. 마흔이 넘으면 그런 이야기가 더욱 필요한 법인데, 재미있는 건 40대 여성들이 이전 어느 때와 달리 지금 나이 드는 게 나쁘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는 사실이다. … 마흔 이후의 삶이 썩 만족스럽다는 것은 젊은 여성들에게는 아마 새로운 이야기일 것이다. 실망스러운 문제가 닥쳐오더라도 이쯤 되면 우리는 좌절하고만 있지 않고 털고 일어나 다시 시작하게 된다. 중년의 삶이 가진 힘과 즐거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리고 그 덕은 상당 부분 페미니즘 운동에 빚지고 있다. … 여성 해방, 여성 인권, 그 무엇으로 부르건 페미니즘은 여성이 나이 듦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어놓았다. … 결국은 우리 모두가 과거의 삶의 각본에서 자유로워지는데 페미니즘은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23~24쪽 

인생에서 가장 강렬하고 멋지고 흥미로운 일들은 40대 후반과 50대에 일어났어요. 그때쯤이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감이 생기지요. 이전 그 어느 때보다 자유를 느낄 수 있어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사람을 찾는 것도 자유롭지요. 친구들을 보면, 최고의 관계는 50대 이후에 생겨났어요.” 

작가 그레이스 페일리 2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