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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cursion

[포르투갈 신트라] 찬물로 말갛게 씻은 듯한 기분이 드는 관광지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6. 11. 12.

신트라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페나(pena)성과 무어(mouros).


저 멀리 산 위에 보이는 알록달록한 성이 바로 페나성


미키마우스의 귀처럼 산 위에 동그랗게 솟아있는 두 개의 성을 스쳐 지나 나는 다른 관광지를 갔다. 하나는 신트라 시내에서 걸어갈 수 있는 헤갈레이라 궁전(Quinta da Regaleira)’, 그리고 또 하나는 걸어서는 갈 수 없지만 (어차피 시티 버스 표 끊었다규!) 성 아시시 공동체가 살았다는 마을 카푸초스(convent of the Capuchos)’.


사실 신트라에는 한적하게 수영하고 맛난 거 먹고 격하게 쉬러 왔다. 그런데 와 보니 한여름이고 나발이고 바닷물이 어찌나 찬지 현지인들도 바다는 놔두고 그 옆의 야외 수영장에서 노는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야심 차게 수영복 입고 무릎까지 담갔다가 걍, 퇴각했다. 아니 무슨 바닷물이 무주 구천동 계곡물보다 더 차냐고! 수영장은 꽤 비싼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것도 모르고 시내에서 떨어진 바닷가에 숙소를 예약했는데, 이곳은 한적하다 못해 20분 거리에 슈퍼가 하나 있는 지경이었다. 격하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오히려 격하게 뭔가가 하고 싶어진 이 꼬인 심사란. 그래서 처음으로 19유로나 하는 시티관광버스 표를 끊고 본격적으로 관광에 나서게 되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수영장에서 수영할 정도로 물이 찼다. 

얼음골 이런 거 좋아하는 사람만이 수영할 수 있는 극한도전 바닷물!!



관광지가 대개 오후 5~6시에 문을 닫으니 하루야 많아야 3곳 정도 볼 수 있다. (새벽부터 일어나 전투적으로 찍고 찍고 다니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페나성과 무어성은 외려 유명하고 입장료가 비싸 꺼려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비슷한 위치에 있는 성 두 개를 연이어 볼 자신이 없어서 건너 뛰었다. (하나 보고 쉬어야 하는 즈질 체력) 그리고는 올망졸망 볼 거리가 많은 신트라 도심 골목을 산책하듯 걸어 헤갈레이라 궁전으로 갔다. 나는 검색 없이 여행했다가 신조인 냥 아무 것도 알지 못했지만 그저 도심에서 걸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대가 없을 때 오히려 기회가 찾아온다


규모와 성격이 완전히 달라 비교하기 거시기하지만, 내게 루브르와 헤갈레이라 궁전 중 다시 가고 싶은 곳을 묻는다면, 나는 헤갈레이라를 택하리라. 루브르 궁전은 15년 시차를 두고 두 번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작작 해 먹어야지, 이렇게 해쳐먹으니 혁명이 나지라는 생각뿐이었다. (내 친구 씨앗도 그렇게 생각했다지) 너무 화려하고 너무 방대하니 뭔가 진이 빠지는 기분이랄까. 먹어 본 놈이 좋은 것도 먹을 줄 안다고, 안 먹어본 나 같은 중생은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에 비해 여름 별궁으로 지어졌다는 헤갈레이라는 자연스럽고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기운을 잔뜩 품고 있었다.


헤갈레이라는 여름 별궁답게 여름에 가야 제 맛이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는 꽃 중에서도 아름답기 그지 없는 수국의 이름을 딴 수국이가 나온다. 이 수국이 자연스럽고 정갈한 정원의 곳곳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하지만 수국이 아니더라도 궁전보다 정원이 더 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정원이다. 정원의 햇살에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힐 즈음 궁전의 예배당이나 시냇물 뒤편으로 이어진 동굴로 들어가보시라. 그곳에서 여름은 까무룩 지워지고 현세의 기운도 사라진다. 우연히 어떤 구멍에 빠졌는데 차원을 이동해 중세 시절 비밀의 화원으로 돌아간 듯싶다. 시냇물 뒤편으로 꼬불꼬불 이어진 동굴을 걷다 보면 마지막에는 우물 밑바닥에서 저 높이 동그랗게 뚫린 하늘을 보는 장관이 연출된다. 마치 영화 배트맨 시리즈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브루스(배트맨)가 갇혀있다가 목숨을 걸고 기어올라 탈출한, 천장만 뚫려있는 지하감옥 같달까. 하지만 그렇게 무시무시한 분위기는 아니고, 한 겹 밖에서는 물소리가 졸졸 들리고 위의 둥근 하늘에서는 햇살이 쏟아내려는 성스러운 분위기다. 휴대폰 사진기로는 어두운 곳으로 쏟아지는 하늘의 빛을 담지 못해 사진은 못 찍었다. 사진으로 증명은 못 해도 이렇고 예쁘고 다정다감한 궁전은 처음 만났다.




정원 곳곳에 흐드러지게 핀 수국들






그 다음으로는 시티투어버스를 타고 유럽의 최서쪽 로까곶(Cabo da Roca)’을 갔는데, 명성이 커서 기대가 컸던 탓인지, 제주 성산일출봉이라는 걸출한 관광지를 이미 많이 본 탓인지, 감히 큰 감응이 없었다. 대서양은 한없이 푸르고 바람은 솔솔 불었지만, 제주 성산일출봉이 사실 더 아름답지 않을까, 하는 마음? ㅋㅋ (호강에 초 쳤지)


세 번째로 간 곳은 관광객이라고는 통틀어 한 10명 정도 있었던 카푸초스다. 한데 종교적으로 신심이 깊지 않은 나도 신심이 생길 만큼 몇 백년이 지난 지금도 성스러운 곳이었다. 가난하지만 다정한 공동체를 꿈꾸던 성 아시시의 가르침을 받들어 만들어진 마을로, 그 가르침이 장소 곳곳에 깃들어 있다. 모든 집과 건물은 돌과 나무로 지어졌을 뿐 아니라 프레임 자체가 개미집처럼 암석을 파 내서 굴처럼 연결되어 있다. 조명은 돌과 돌, 나무와 나무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자연광이고, 천창 역시 일부러 뚫어놓지 않은 듯 돌과 돌이 엇갈리는 구멍처럼 나 있다. 한 여름에도 동굴의 효과인지, 땀을 마를 정도로 시원하다. 개인 실은 한 짝짜리 옷장 크기처럼 작지만 공동공간과 기도실, 명상실이 곳곳에 있어 갑갑할 거 같지는 않다. 간혹 약간 큰 방이 나오는데 아픈 사람이 묵는 공간이었다고 한다. 곳곳에 보이는 십자가마저도 자연물의 소박한 기운 그대로 만들었다. 성 아시시의 생태주의 사상을 공간으로 체화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참으로 성스럽다. 어느 유명한 유럽의 성당들보다 더욱.



암석 속을 개미굴처럼 파 내서 지어진 방들


코르크 마개 재질의 나무로 만들어진 십자가와 문, 창틀 

습기를 막는 효과가 있다. 

여기도 수국 :)

직접 보면 그 소박함에 마음이 살랑살랑해진다. 


헤갈레이아도, 카푸초스도 한 여름에 천천히 걷기 좋은 관광지다. 특히 카푸초스는 휴대폰을 꺼 놓고, 아무 말 없이 찬찬히 스스로를 되돌아보기에 좋다.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이 지금껏 잘 전해져 내려오다니! 관광지임에도 관광지의 들뜨고 산만한 분위기에 젖기보다는 깨끗한 찬물로 말갛게 씻은 기분이다. 수영하러 갔다가 관광만 하고 돌아왔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충분히 좋았다.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 것이 여행의 매력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