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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cursion

[스페인 세비야] 몸의 움직임을 예술로, 플라멩코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6. 11. 17.

몸치인 나는 체육시간과 운동회가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수리영역 I 때문에 수능 점수를 말아먹었지만 달리기나 공놀이를 할 바에야 미적분을 푸는 것이 100배 더 좋았고, 엄마 뱃속에서부터 잘 움직이지 않는 태아로서 체육을 '디스'했을 거야, 라고 믿어왔다. 매년 국민학교 운동회 때마다 전교생이 학년별, 학급별로 100미터 달리기를 했는데, 그때마다 코피란 것이 좀 나봤으면 좋겠다고 빌었었다. 그러면 달리기에서 빠질 수 있을 테니까. 국민학교 6년 내내 나는 100미터 달리기에서 늘 한참 뒤진 꼴등이었다. 뭐 어때, 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못 만나서였는지, 내 몸이 '찐따'같다고 느꼈고 그래서 참으로 부끄러웠다. 고등학교 때 체육선생님은 학생들 앞에서 어떻게 그 (뚱뚱하지 않은) 몸으로 100미터를 25초에 뛸 수 있냐며, 너는 매사에 노력하지 않는다고 혀를 끌끌 차셨다너무 열심히 뛴 탓에 혀를 입 밖에 덜렁거리며 헥헥대던 나는 뭐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사람이란 동물은 헬스장 러닝머쉰에서 뛰다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서른이 될 때까지 30여년 동안 몸을 움직이는 즐거움 따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살기 위해 먹는 사람처럼 살기 위해 움직이는 기계적인 동작을 수행하는 몸이었다.


내 인생의 쌈짓돈이자 상여금처럼 귀중했던 나의 전 룸메(룸메이트)들은 대개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내가 20대를 보낼 무렵 30대와 40대를 넘어서던 전 룸메들은 밤마다 스트레칭이니, 요가니, 달리기 등을 습관처럼 하곤 했다. 시큰둥한 얼굴로 그게 재미있냐고 묻는 내게 그녀들은 너는 아직 젊어서 여기저기 결린 데가 없지, 라며 웃었다. 몸이 뻐근해서 안 하고는 못 배긴다고 했다. 그리고 몇 년 후 하루 종일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30대 직장인이 된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는 목 디스크와 허리 디스크에 걸려 팔을 위로 똑바로 못 들어올리는 지인들이 포진했고, 이대로 가다가는 나도 멀지 않았다 싶었다. 어느 덧 나도 15년 전의 그녀들처럼 방바닥에 엎드려 뱀 자세를 하고 있었는데, 뭐랄까, 꾸깃꾸깃 구겨진 셔츠가 펴지듯 허리에 다림질하는 기분이었다. 고작 10분간 스트레칭을 했는데 방콕에서 타이 마사지 두 시간 받은 것보다 시원하잖아! 어깨에 뭉쳐있던 근육의 알갱이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두둑두둑 짓이겨지는 소리가 났다. 자기 몸의 소리를 듣고 움직임을 분해하듯 천천히 음미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나는 몸이 주는 감동에 휩싸였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불수의근 심장근육, 팔꿈치 근처 근육을 지압하면 저절로 움직이는 가운데 손가락은 물론 온전히 내 뜻대로 운동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경이로움이란.


작년부터 현 룸메와 밤마다 망원유수지에 나와 배드민턴을 친다. 나는 여전히 심각한 몸치라 일년 넘게 배드민턴을 쳤는데도 초보 수준이다. 태릉 선수촌에서 금메달 따려고 연습하는 것도 아닌데 뭘. 우리는 사실 배드민턴 경기 점수 계산하는 법도 모른다. 망원유수지 공원에서 치는 거라 점수를 가늠할 기준인 네트도 없다. 그래도 배드민턴은 정말 환상이다! 스케이드 보드나 기타를 연습하는 사람,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 한둘 밖에 없는 자정의 망원유수지에서 바람을 맞으며 배드민턴을 칠 때, 나는 중력이나 만유인력 같은 물리적 법칙이 닿지 않는 다른 세상에서 부유하는 듯하다. 육체가 만들어낸 물리적 운동 에너지를 타고 정신적 기운으로 충만한 비물리적 세계에 도달한다. 그저 행복한 지금 이대로의 순간. 룸메와 나는 유럽에 가서도 공원이나 공터를 찾아 배드민턴을 치는 일상을 즐겼다


결국 자전거 타기, 달리기, 수영, 배드민턴처럼 외부 에너지가 아니라 몸으로 맞부딪혀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사랑하게 되었다. 운동은 배우기 쉽고 비싼 장비가 필요치 않고 어디서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일수록 좋다. 좀더 일찍 이 즐거움을 알았더라면 조금 덜 신경질적이고 조금 덜 성깔을 부리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체육을 통해 몸 활동을 접한 후 지긋지긋하고 싫은 마음밖에 남지 않은 소녀들이 안타깝다. 어릴 적 고무줄 놀이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채 체육교사의 눈을 피해 운동장 한 쪽에 앉아 있는 소녀들. 몸이 불편하든 아니든, 몸치든 아니든 몸을 움직이는 즐거움의 싹을 틔울 수 있는 체육시간이 되면 좋겠다. 못 해도 된다고, 친구들과 즐겁게 움직이며 내 몸을 부끄럽지 않게 여길 수 있기를. :)   






플라멩코로 유명한 스페인 세비야에서 한 시간 여의 플라멩코 공연을 보며 이런 생각들을 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의 의미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술이니까. 손뼉, 발 굴림,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는 동작, 이리저리 굴리는 눈동자, 손바닥으로 몸을 치는 행동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극도로 간단하고 선명한 동작들만으로 극도로 아름답다. 오컴의 면도날처럼 가장 단순한 것이 진리인 걸까. 세비야에는 플라멩코 길거리 공연도 많지만 19유로를 들여 공연장에서 상영하는 플라멩코 보기를 권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볼 때에야 몸이 뿜어내는 광대한 에너지를 뚜렷이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길거리 공연자들의 경우 기교가 뛰어나지만 플라멩코의 동작으로 빚는 몸의 에너지가 실체를 띄고 전해질 만큼 카리스마가 진동하지는 않는다. 내가 봤던 공연의 경우 쥐어진 주먹의 손가락을 하나씩 펴는 동작마저도 고이 나빌레라’ 하는 나비의 날개짓처럼 퍼득거렸다. 부피와 양감을 가지고 관성을 거슬러 움직이는 것들의 생명력을 보는 듯했다.  


 플라멩코에 사용되는 도구들 

 세비야에서는 바비인형도 플라멩코 옷을 입는다.


 세비야 길거리  플라멩코 공연



하지만 플라멩코처럼 몸의 움직임을 예술로 승화시키지 못한들 어쩌리.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필부필녀인 우리는 각자가 지닌 육체의 한계 속에서 자신의 몸을 가지고 노는 즐거움을 익히면 된다. 특히 이래저래 몸에 갇혀서사는 여자들이 그 즐거움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자기 몸을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페미니즘을 접하는 길이다. 말갛고 어렸던 시절에 누리지 못했던 즐거움이 아쉬워서 빨려들듯 플라멩코를 바라보았다



 플라멩코 공연장에서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들

(소규모 공연장이라 50~80명 정도면 꽉 차는 듯) 

 무대 의자

 대개 하루 두번 공연, 유명한 공연의 경우 미리 오전에 표를 사놓는 것이 좋다.

나는 트립어드바이저에서 플라멩코 공연 1, 2위에 올라와 있는 것을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