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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cursion

여행의 설레임보다 일상의 온전함에 온기를 느끼는 나이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6. 7. 1.

안식년 여행을 떠나오기 전 3~4달간 일이 휘몰아쳤다. 여행 일정과 예약은 고사하고 스페인 바닷가 산세바스티안을 목전에 둔 채 겨털도 못 뽑고 밀림이 왕성한 털들을 모시고 비행기를 탔다. 이러다가 영화 <색계>에 나온 '탕웨이' 되는 거 아냐? (라고 생각했지만 겨털 있다고 아무나 탕웨이 되남 -_-) 머리털 휘날리게 바쁘다는 표현을 휘날리는 겨털을 못 뽑을 정도로 바쁘다고 수정하는 바이다. 


애니웨이, 암만 바쁘고 힘들어도 괜찮았다. 장장 6개월에 걸쳐 여행만 할 건데 염병, 못 할 일이 뭐시가 있당가. 나는 따박따박 통장에 월급이 입금되는 동안 여행을 한다는 자체로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 감히 어떤 불만도 이야기 꺼내면 안 될 존재였고, 나도 느자구가 있는데 그래서야 쓰겄으. (그럼에도 불구하고 쩜쩜.) 겨털 나고 이런 호사를 누린 적이 있었냔 말이다. 중년의 '그랜드 투어'라고나 할까. 그랜드 투어는 17세기 중반부터 영국의 내로라하는 귀족 자제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 프랑스, 이탈리아 등을 돌아다녔던 여행을 일컫는다. 유럽과 미국의 청년들이 고등학교를 마친 후 바로 대학에 가지 않고 1년 정도 여행이나 인턴 등 경험을 쌓는 '갭 이어 (gap year)'가 현대판 그랜드 투어인 셈이다. 오바마의 딸이 대학 입학허가를 받아 놓고도 1년을 유예한 것처럼.     


여행은 떠나오기 전에 제일 좋다고 하던데, 떠나보니 사실이었다. 아마 그랜드 투어도 떠나기 전이 제일 좋았을 지도 모른다. 비행기 여독이 풀리지 않아 시차는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아침이고 밤이고 잠을 잤다. 새벽같이 일어나 다들 외출한 텅 빈 도미토리에서 부스스 잠을 깨 잠시 먹으러 나갔다가 한적한 한낮의 도미토리로 돌아와 잠시 낮잠을 잔다는 것이… 눈 뜨면 저녁이었다. 저녁을 먹고 산책하다가 돌아와 잠에 들면, 다음날 오전이 훌쩍 넘어있었다. "그렇게 일찍 자면 시차 때문에 새벽에 깨요" 라는 조언은 젊은 사람들에게나 통했다. 처음에 그 말을 듣고 새벽에 깨면 공동공간에서 고요히 책을 읽어야지, 라고 야심 찬 계획을 세웠건만 시차는 개뿔, 일주일 내내 잠에 절어 있었다. 이 나이에 중년 태를 내기 좀 부끄럽지만, 어쨌든 중년의 여행이란 이런 것이다. 10킬로의 짐을 이고 지고 14시간의 비행을 거치면 시차도, 관광도 모른 채 몸이 소금물에 절여진 오이처럼 쪼글쪼글한 피클 상태가 되고 만다.  


파리의 샤를드골 공항에서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아무런 공지 없이 2시간 30분을 연착했다. (인도에서 8시간 연착했던 기차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심정으로 버텼다.) 이런 제길. 기다려야 할까, 오기는 오는 걸까, 아무리 기다려도 결국 안 오는 걸까, 너무 많이 기다렸는데 이제와 포기하면 아깝잖아, 역시 싼 표가 비지떡이야, 지금이라도 버스표를 버리고 열차를 타고 시내로 갈까, 이런 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번잡하고 불안했다. 하릴없이 삐대면서 공항을 떠나거나 공항에 도착한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처럼 공항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펼쳐졌다.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런데 버스를 기다리면서, 공항 속 사람들을 보면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나는, 달콤쌉싸름한 깨달음이었다. 그 전에는 돌아오는 사람들보다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들만이 눈에 밟혔다. 먼 곳을 떠날 채비를 하며 활주로에 대기하고 있는 비행기가 놓여진 공항이라면 더욱. 공항의 엑기스는 오직 어딘가로 멀리 떠나가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샤를드골 공항에 무사히 착륙해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는 프랑스 사람들을 보면서 떠나는 자보다 돌아오는 자만 풍기는 온전하고도 안온하고도 아쉬운 여행의 흔적을 발견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당신들의 발걸음.


가는 곳마다 낯선 와이파이를 연결해 새로운 비번을 입력할 필요도 없고, 지도나 구글맵을 통해 길을 확인하며 여기가 맞는지 살필 필요도 없고, 기다리는 버스가 오는지 안 오는지 가슴을 졸일 필요도 없고, 호스텔 욕실에 내 칫솔과 수건을 들고 갈 필요도 없는, 익숙함 투성이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저 매사에 무심해도 안심할 수 있는 일상.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인천공항에 가는 길은 미칠 듯이 설렜었다. 마이앤트메리의 ‘공항 가는 길’의 멜로디처럼. 그런데 이제는 여행을 마치고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무심한 길에도 여행의 기쁨이 몽글몽글 맺혀있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피곤한 몸에 절어 웬만한 곳은 건너 뛰고 가만히 앉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중년의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라는 것도. 


하루가 끝나고 익숙한 잠자리에 몸을 뉘이는 일상


여행작가라는 직업이 세상의 가장 낭만적인 일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집에 온전히 돌아와 익숙한 잠자리에 몸을 뉘이고 익숙한 사람과 함께 로비 무비를 보며 잠드는 금요일 저녁이 가장 낭만적인 시간처럼 느껴진다. 나는 여행이 예전만큼 설레지 않은, 밋밋한 중년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도 좋다. 낯선 여행보다 익숙한 일상이 더 좋아지는 나이듦이라면, 이대로도 좋아요. 시차도, 관광도 모르쇠할 만큼 몸은 안 따라주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