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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cursion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카이샤포룸 마드리드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6. 7. 10.

마드리드에는 유럽의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프라도 미술관이 있다. 프라도 미술관 입장료는 12유로인데, 문닫기 2시간 전부터 무료로 개방한다. 평일에는 오후 8시, 주말에는 7시에 문을 닫으니 각각 6시와 5시부터 입장권 없이 들어갈 수 있다. 미술관 입구로 길가에 (표 사서 들어가는 티켓라인 말고) 아이돌 팬사인회처럼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바로 무료 입장을 기다리는 인파다. 줄이 길어 들어가는데도 꽤 오래 걸리니, 무료 입장을 할라치면 한 시간쯤 일찍 가서 자리를 잡는 것이 좋다. 


하지만 프라도 미술관을 관람하는데 무료로 주어진 2시간이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다. 늘어선 줄을 잘 감상하고서는 근처의 레티로 공원(Parque del Retiro)에 누워 책을 읽었으니까. 나는 프라도 미술관에 들어가지 않았다. 슬쩍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아픈 웅장한 미술관은 클래식한 유럽에 차고 넘친다. 하지만 개뿔 아는 게 없는 나는 실화를 앞에 두고도 별 감흥이 없는 인간. 실화를 보고 깨달은 점이라고는 무식하면 감동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예술 작품을 마주하고 넋이 빠지는 ‘스탕달 신드롬’은 나에게 불가능했다. 나는 미주알고주알 알려주는 ‘유럽 미술관 산책’류의 책이 실화보다 더 와 닿는다. 게다가 루브르 미술관에서 수많은 머리통을 헤치고 ‘모나리자’ 사진을 찍는 사람들만큼 사진이나 기록에 열정적이지도 않다. 그러니 고야의 작품도 책으로 읽으리라, 마음 먹고서 프라도 미술관을 지나쳤다.







마드리드의 허파, 레티로 공원에서 보트타고 선탠하고 쉬는 사람들




레티로 공원에 누워 책 읽기 (feat.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살아보기)



그럼에도 산책하듯 한들한들 볼 수 있는 크지 않은 미술관들은 좋다. 이를테면 '대림미술관'이나 '구슬모아 당구장' 같은 크기랄까. 혹은 서울시립미술관의 한 층 정도? 한두 시간이면 충분해서 인사동 쌈지길 구경하는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들, 여유공간이 충분해 전시를 보다가 쉬엄쉬엄 앉아있을 수 있는 미술관. 그런 미술관들이 오래된 장소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면 더욱 좋고 말이다. 이런 취향이라면 프라도 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카이샤포룸(CaixaForum)’에 들려봐도 좋겠다. 곳간의 낱알을 파먹는 쥐처럼 살갓읓 파고드는 한낮의 더위를 피해 시원한 카이샤포룸의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슬렁슬렁 전시를 보고 나와, 해는 한풀 꺾였지만 여전히 눈부시게 환한 저녁 언저리에 레테로 공원의 그늘에서 한숨 자는 마드리드 여행.

 

카이샤포룸은 1899년에 지어진 건물로 오랫동안 마드리드의 화력발전소로 사용되었다. 화력발전소로 쓰던 건물을 2001년부터 2007년까지 천천히 손보고 고쳐 여유작작한 현대 미술관이 되었다. 런던의 화력발전소였던 건물을 테이트모던(Tate Modern)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스위스 건축회사가 리모델링을 했다. 내가 갔을 때는 포르투갈과 영국, 독일 등 유럽의 중견 작가들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오래된 화력발전소 벽돌과 ‘깔맞춤’하기 위해 건물 위층 부분은 산화된 동판으로 이어 고쳤다. 그 덕분에 오래된 건물의 풍취에 독특한 느낌이 가미되었다. 입장료는 2유로인가 4유로였고(?) (암튼 부담스러운 가격은 아니었음) 8시에 문을 닫는데, 두 시간이면 떡을 칠 만큼 한가롭게 전시를 볼 수 있다. 꼭대기 층에는 카페테리아가 자리잡고 있다. 카페테리아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로비에 큰 소파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아트샵이 있고 무료 와이파이가 되니 여기서 시간을 보내도 충분히 한량스럽다. 게다가 사람도 붐비지 않는다. 





카이샤포룸 마드리드 외부와 로비, 그리고 계단


2016년 6월 전시 중인 작품


아트샵의 엽서 

(응? 서울시 새 로고 I SEoul U '나와 너의 서울이냐?') 



오래된 벽돌과 어울리도록 산화된 동판을 올린 건물



건물을 돌아나오면 식물들이 살아 숨쉬는 4층 높이의 수직 정원이 펼쳐진다.이 수직정원에는 마드리드에서 자라는 식물 250종, 약 1만 5천여 식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살아가고 있다. 수직 정원을 배경으로 그 앞의 거리는 작은 공원이자, 공연장이자, 쉼터이자, 도시의 오아시스가 된다. 아마 바로셀로나 카이샤포룸과 구별되는 마드리드 카이샤포룸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카이샤포룸은 스페인 은행이 만든 공익재단에서 하는 문화사업 중 하나다. 재정이 안 좋아지면 약간의 입장료를 받지만 보통 무료로 개방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펼친다. 현재 3층 전시는 입장료를 내지만 4층의 전시공간은 무료 개방이다. 무료로 개방한 전시실에는 이주민과 노숙인 등 소외계층에게 사진, 영화, 만화 등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예술적 수단과 워크샵을 제공한 후 그 결과물을 전시하고 있었다. 리움미술관의 워크샵에 고급진 사모님들께서 '문화센터' 강좌를 즐기듯 오시고 미술관 자체의 입장료도 부담스러운 것을 생각하니, 좀 부럽다.   



이것은 건물 한 쪽 벽면인데, 이렇게 '땅'처럼 보일 줄 알았으면 건물 전체로 찍는 건데 그랬으 ㅠ.ㅠ

     

 

스페인이나 프랑스의 길가에 널린 건물 중 상당수가 1800년대 후반이나 1900년대 초에 지어진 건물이라 카이샤포룸의 역사도 그리 놀랍지는 않다. 다만 ‘우장창창', ‘옥바라지 골목’의 강제집행 뉴스를 읽으며 도시의 오래된 건물들, 간판에 1890년부터 카페였다고 적힌 가게들을 지나고 있자니 마음이 쓰리다. 서울이 짠하고 안쓰러워서 속이 상한다. 식민지 시대와 급격한 개발에 휩쓸려 자신의 역사를 간직하지도, 그 안에 깃들인 사람들을 품을 수도 없었던 서울. 남산과 한강이 있어 더없이 아름답지만 지금도 여전히 파헤쳐지고 부숴지고 쫓기고 무너뜨려지는, 끝없이 ‘공사 중’인 땅, 그리고 그 속에서 단골이라는 관계를 맺을 수도, 오래된 공간이 간직한 시간을 뭉근히 끓여낼 수도 없는 사람들. 클래식이고 예술이고 개뿔도 모르지만 유럽의 거리에 깃들인 눅진눅진한 기품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기품이란 본디 시간을 들여야 완성되는 고전 같은 것이니까. 500년 이상 수도였던 서울에는 물리적인 역사성이 있을지언정 이런 기품을 살아 숨쉬게 하는 많은 공간들이 이미 뭉개져 버렸다. 건물주인 리쌍과 싸이라고 왜 할 말이 없겠는가마는, 끊임없이 이런 입장만이 이겨왔던 결과 우리가 사는 공간은 기품을 잃고 말았다. 이야기와 시간이 깃들이 작은 공간들이 서울에서 올망졸망 살아남기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다치는 일이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