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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2. 3. 13.
: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




일하는 '업계' 관련 책이라서 집어들었지만  (환경, 복지, 건강, 생태='업계' 관련 책 )
내가 외환딜러라도, 폐지줍는 아줌마라도, 광고인이었다고 해도,
아니 새벽 5시 30분 첫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를 가야하는 비몽사몽의 상황에서도
키득키득거리며, "뉘귀야, 이 작가는?", 하고 작가 프로필을 읽어보게 만드는 말빨이었다.
'업계' 분야라서 일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했던 책 중 순수하게 즐거웠던 책은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사는 법><나를 미치게 하는 정원이지만 괜찮아> 쯤이었는데 
이 책, 역시 순수하게 책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 주었다.

한 마디로
이 작가, 복지 분야의 '빌 브라이슨' 되시겄다.
하여
내가 내 맘대로 지은 이 책의 부제는 '발칙한 복지국가 산책' 이랄까. ㅎㅎ

'발칙한 복지 국가'인 독일에서 살아보고 여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의 습속을 발칙하게 그렸다.
그 시민들의 삶의 모습이란 이렇다.

전화통화 말미에 나는 담당자에게 금요일 오후 2시 밖에 안 되었는데도
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투덜댔다.
"당연히 그렇지요. 선생님이 사회민주주의 국가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걸요." 
p 295

규모는 작지만 떠오르는 글로벌 은행에서 일하는 젊은 독일인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노사공동결정 이사회에 정원사가 노동자 이사로 선출되었어요.
은행에서는 보통 영어를 사용하는데 그 사람은 영어를 못해요.
결국 이사회 회의에서는 모두 독일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어떤 내용이 논의되는지 노동자 이사가 알아야 하니까요."
아! 세계화에 이런 식으로 대항할 수 있겠구나!
정원사를 이사로 앉혀 영리하고 똑똑한 경영자 쪽 이사가
그에게 천천히, 그리고 독일어로 설명하게 만든다.
p 164
->독일은 노사공동결정제도를 운영하는데 최고경영자 선출 등 중요한 사안을 노사공동결정 이사회를 통해서 결정한다.

"잠깐만요. 그런 복장으로 변호인석에 앉을 겁니까?"
(변호사는 법정에 출두하기 위해 스포츠 점퍼 차림을 하고 있다.)
"이 차림이 어때서요? 판사도 청바지 차림일 텐데요, 뭐."
-> 독일 녹색당 국회의원이 의회에 청바지 차림으로 출석했다고 하던데, 법정도 같은 시츄에이션이었다! 

불쌍한 월마트 이야기를 해 보자. 월마트는 토종 슈퍼 체인점인 알디를 이기지 못했다.
이유 중 하나가 고객이 구입한 물건을 봉투에 담아주는 직원을 계산대마다 대기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 (중략)...
고객을 섬긴답시고 하인처럼 굽실거리며 물건을 담는 직원에게 거부감을 느꼈다.
'하인'의 손을 빌리지 않고 물건을 산 사람이 직접 봉투에 담는 게 편해서였다.
P 303

독일에서는 고용계약서상 6주의 휴가가 보장되어 있다. 독일에서 일하는 미국인의 말이다.
"6주 중 3주는 연속으로 휴가를 사용하라고 했어요.
3주 연속으로 휴가를 사용하지 않으면 몸이 치유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듯해요.
1년 내내 일만 하면 몸이 망가진다는 말을 들었어요."
p 378
->그렇다! 망가진다!!

미국에서는 공장 문을 닫고 사업을 접기가 무척 쉽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공장 문을 닫으려면 엄청난 손실을 각오해야 한다.
경영자는 직원의 생계 보장계획, 해고수당지급계획 등이 담긴 폐쇄 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
p 137
->직장폐쇄를 감행한 사측에 몇 년간 맞서 싸우는 '콜텍' 노동자들 생각이 쓱, 스친다.

부유한 사람들은 공적연금, 무료 의료보험이 원활히 굴러갈 수 있도록 많은 세금을 납부하고
그 아래 계층의 다수의 유럽인은 중상류층이 오페라를 관람하는 비용을 얼마간 보조해 준다.
이것이 사회계약이고 유럽식 거래이다.
사람들은 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 자기 돈을 쓰는 대신 서로 교차 보조하는 것일까?
이론적으로 볼 때 교차보조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일종의 방위조약과 같이 사람들을 하나로 결속한다.
p 103~104


사진: 독일의 사회민주주의를 떠받치는 3가지 제도
<누구를 해고할 것인지, 근무시간을 어떻게 정할지 등을 논의하는 직장평의회,
노동자와 경영자가 회사의 중요사안을 함께 결정하는 노사공동결정제도,
1.6 제곱킬로미터 안의 지역에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에 따라
회사에 상관없이 같은 임금을 적용하는
지역별 임금결정제도>   
 
사적 영역에서 흘러넘친 행복(well-being)이 공적 영역으로 흘러들고,
그 결과 누구나 봉봉사탕을 맛보듯 행복을 만끽하게 되는 사회.
그래서 종일 봉봉사탕만 먹고 아무 것도 사지 않아도 되는 사회(p 26)가 바로 그가 본 사민국가다. 

그에 비해 미국이 구현하고 있는 자유경쟁제체는
1인당 GDP를 상승시키는 동력이 삶을 즐기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데서 나온다. (p 84)
그리고 누군가의 안간힘을 빌미로 누군가의 탐욕을 채우는 GDP, 바로 악성 GDP가 성장의 주축이 된다. 
구럼비 앞 강정바다에 퍼붓는 초특급 콘트리트, 신규 핵발전소와 핵 폐기물 저장고도 모두 악성 GDP를 높이는 요인이다.

악성 GDP를 하도 많이 봐서 그런가. 
'발칙한 복지 국가'를 산책하는 지은이의 행보를 읽으며 나도 이렇게 중얼거렸다.
"한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P.S
1. 굶어죽는 나라에서 안 태어난 것이 어디냐고,
물자 풍부한 미국에 태어나서 호강에 초 쳐서 저런다고 하시는 분들께.
복지국가 이야기가 주제인 책에 대고 굶어죽는 나라에서 안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해수면 상승으로 가라앉고 있는 투발루에 가서 왜 사막화 대책을 세우지 않냐고 호통치는 것처럼
뜬금없는 헛소리랑께요.

2. 봉봉사탕은 커녕 정작 사민주의 국가의 자살률이 높고 우울증 걸린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존 스튜어트 밀은 정으로 행복한 사회는 더 높은 정신적 불행을 느끼도록 닦달하는 사회라고 주장했다.
신은 죽었다고 주장하던 차라투스투라가 광인으로 취급받으며 느꼈던 그런 고차원적 불행 말이다. P 386
이 고차원적 불행은 오직 생존 자체가 투쟁인 사회에서는 번성하기 어렵다. 
예컨대, 자살은 생존하기 힘든 상황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고 몸부린친다.
반대로, 자살은 생존문제가 해결되고 존재문제가 심해질 때 일어난다. 
(녹색대안을 찾아서 p 36)

3. 흥, 유럽의 PIGS(포루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는 어쩌고?
유럽의 사민주의 모델도 재정위기에 봉착한 것은 아니고?
-> 책을 읽으시오.
센스있게도, 저자가 이미 답을 점지해 놓으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