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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ble

[스페이스 소] 동네에서 여행하는 기분의, 근사한 공간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7. 12. 3.

동네에 멋진 공간이 생길수록 어딘가로 여행을 다녀오는 감상에 빠질 수 있다. 별일 없이 동네를 산책하다발견한 의외의 공간이야말로 일상을 여행처럼 반짝이게 한다. 딱히 어여쁠 것도, 기억할 것도 없는 일상다반사에 일일이 감동 받는 여행자의 감상이 절로 솟아난달까. 게다가 수억 톤의 탄소발자국을 남기는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되고, 그 덕에 죄책감에 시달릴 일도 없다.

지금 나는 보고 듣고 느끼는 족족 사진과 글로 남기고 싶어 환장하는 여행자처럼, '스페이스 소'의 철제 바에 앉아 포스팅을 쓴다. 동네는 고즈넉하고, 공간은 환상적이고, 딱히 할 일 없는 지극히 오랜만의 일요일과 혼자만의 오후. 달리 무얼 바라겠는가.

서교동의 오밀조밀한 다세대 빌라와 큼지막한 단독주택들 사이에 새로 생긴 '스페이스 소'는 1, 2층의 전시 공간과 카페로 이루어져 있다. 인생은 '쏘' 짧고 예술은 '쏘' 길다. 그리하여 '소 스페이스'. 

-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 17길 37 
- 매일 11시~19시
- 페이스북
https://m.facebook.com/spaceso2017/
- 팁: 전시를 본 후 전시관 건물 카페에 들러 커피와 휘낭시에를 먹는다. 비엔나 커피 크림 어쩔, 환상이야. 커피가 먹고 싶을 때 떠올린 만한 수준의 카페.

지금 진행 중인 박형근 작가의 '두만강 Faint' 전시를 보며 박완서 작가의 글을 떠올렸다. 박완서 작가가 지인들과 연변 여행을 갔다가 펑펑 울었던 사연, 그리고 그 사연을 기반으로 썼던 단편 소설. 오래 전 밤, 제목도 잊은 그 소설을 읽으며 나도 펑펑 울었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백 만번 불러도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통일의 한'이 마음을 저미게 하던 소설 읽던 밤. 고향을 잃은 타인의 고통과 난민의 삶을 상상하게 했던 소설. 

박완서 작가의 글에는 두만강 건너 함경도 땅을 바라보며 전신을 떨며 통곡하거나, 압록강 유람선에서 신의주 사람들에게 손 흔들다가 끝내 고개를 떨구고 통곡하고 마는 남자 '어르신'들이 나온다. 박형근 작가의 사진에도 온 몸으로 눈물을 흘리는 지극한 실향의 고통이 서려있을 듯한 경계의 땅이 들어있다.     

전시를 보고 전시장 옆 카페에 들어와 비엔나 커피를 마셨다. 통곡하는 사람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그렇지만 위로하고 싶을 때 아무 말 없이 건네고 싶은 맛이다. 카페 주인장은 이제 막 구운 휘낭시에를 선물로 내주셨다. 휘낭시에가 이렇게 촉촉한 빵이었다니, 지금까지 먹은 휘낭시에는 브라우니처럼 퍽퍽한 질감이었는데. 그래서 핸드 드립으로 내린 과테말라를 시킬 수밖에 없었다. 휘낭시에에는 아무 것도 첨가하지 않은, 플랫 블랙이 어울리니까.

서교동 골목길을 걷는다면 '스페이스 소'에 들러 전시를 보고 커피 한 잔. 운이 좋다면 전시장 바깥에 설치된 길냥이 사료 보급소에서 식사 중인 '고등어 테비'도 볼 수 있다. 혹은 밥을 먹고 총총 사라지는 고양이의 뒷모습이라든지. 인생은 짧지만 여행자에게 각인된 한 순간의 경험은 인생을 쥐고 흔들 만큼 강렬하다. 그리고 그런 것을 동네에서 즐길 수 있다면 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