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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cursion

계절의 벨에포크 10월에 페즈와 공원 단상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7. 10. 8.

개천절 날 아빠가 물으셨다. (뜬금포…)

왜 개천절이 10 3일인 줄 아느냐.

요거시 뭐시당가

왜 서울 지하철의 2호선이 파랑도 분홍도 아닌, 녹색이냐? 라는 질문처럼 원래애당초 그런 것 아닙니꽈. 답인즉 10월은 추수감사 시즌으로 가장 상서로운 달,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 3이라는 숫자 역시 가장 상서롭기 때문이란다. 10/3이 단군님 생신이 아니라니


그 말을 듣고 10월의 풍경을 바라보니 정말 상서롭기 이를 데 없었다. 어디를 보나 아름답다. 섬진강 변의 벚꽃 길, 들녘의 노랗게 익어가는 벼, 길가에 핀 코스모스, 한강의 강아지풀 군락,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고 햇빛은 반짝이고 바람은 살랑거린다. 가장 아름다운 한때 벨에포크’의 10월.

추석 연휴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달리다 벨에포크를 생각했다. 도시의 공원은 응당 자연스럽게 펼쳐져 있고 계절감을 뽐내는 꽃들이 만발해있고 사람들은 눕거나 뛰어나 앉거나 걸으며 공원의 한 요소가 된다. 내게 서울이 살기 좋은 도시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만한 풍경이었다. 아무나, 언제든 즐길 수 있는 공원의 모습을 통해 수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도시가 어여쁘게 여겨졌다.

집 근처에 좋아하는 공원이 있는 삶이란 겨울철만 빼면 매일매일 선물을 받는 것과 같다. 날씨 좋은 날, 공원에는 소풍 가기 전날의 달뜬 공기가 카푸치노 거품처럼 풍성하게 담겨있다. 공원에 들어가 바람을 맞고 있자면 내장 속을 환기하듯 바람이 온 몸을 투명하게 통과한다. 이 도시에서 책 읽고 이야기 나누고 운동을 하고 휴식을 취하고 연애를 하는데 공원처럼 매력적인 장소가 어디 있을까.


모로코의 옛 수도 페즈(Fez)를 여행할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곳은 9,000여 개의 골목길이 개미집처럼 연결된 메디나가 아니었다. 감히, 아라비안 나이트의 배경이 될 만한 이국적인 미로의 시장보다 도심 속 공원에 더 끌렸었다. 유달리 멋진 모스크 식 정원이라 그런 것은 아니었다. 베를린의 티어가르텐에 대면 천 분의 일 정도 크기일 것이다. 그러나 사막에서 56일을 지내다 온 당시의 내게 녹지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 35도가 넘는 페즈의 여름 기운이 녹지 아래에서만은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페즈의 블루게이트

페즈의 클락 카페 (예전 물시계 건물)

타일바닥에서 쉬는 고양이

모스크 안의 풍경

페즈의 염색장


공원은 바깥 세상과는 단절된 듯 비현실적으로 잘 관리된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공원은 왕실 소유였다. 공공장소 중 비현실적으로 좋다 싶으면 대략 왕가 거더니 공원도 그랬다. 시민들에게 개방된 시간은 아침부터 저녁 7(?)까지로 퇴근 후에는 들어갈 수조차 없다. 그저 나처럼 낮에 한들한들 돌아다닐 수 있는 한량들만이 누릴 수 있을 뿐. 내가 이토록 더운 나라에서 밤에도 공원을 개방하면 좋겠다고 하자 숙소 주인장은 사람들이 꽃을 뽑아가고 공원을 해쳐서라고 답했다. 공원이란 시민들이 언제나 이용하는 공공장소라는, 내가 알고 있는 개념과는 달랐다. 해가 진 후 페즈의  많은 시민들이 광장 옆 커다란 시멘트 계단에 앉아 여름 밤을 보내고 있었다. 나무 하나 없고 꽃 하나 없고 오로지 한낮의 열기를 이글이글 뿜어내는 콘트리트 바닥이었다.


스페인에 있는 공원인 줄...

한가로운 공원의 낮 풍경


공원에서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했다. 오마이뉴스 기사에 따르면 서구의 공원은 중세 영국 왕족 등 귀족들의 사냥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런던의 하이드 파크 역시 1536년 헨리 8세가 사냥터로 만든 곳으로, 당시에는 귀족의 영지라 일반인의 출입은 제한되었다. 그러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사냥터 근처의 시가지가 개발되었고, 동시에 시민권이 성장하면서 시민들에게 사냥터를 열어 공공공간, 즉 공원이 되었다. 지금이야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공원을 이용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도시공원의 존재는 구체제(봉건사회)의 붕괴와 현대 민주사회의 도래를 상징한다. (참고한 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14427 


페즈에서 여전히 잘 관리된 공공장소는 왕가의 소유이고 시민들에게는 제한적으로만 이용이 허가된다. 하지만 물을 많이 먹는 꽃들로 아름답게 꾸미지 않아도 뜨거운 열기에 강해 잘 살아남고 크고 무성한 잎들을 드리워 그늘을 만드는 나무가 있는, 무엇보다 언제든 누구든 마음껏 이용할 있는 공원이 생기기를 기원했다. 단지 공원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회의 민주주의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니까. 더 추워지기 전에 서울에 새로 생겼다는 20개의 공공공간 투어에 나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