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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cursion

독일의 슈퍼마켓에서 떠올린 '만일'의 채식주의

by 금자 불친절한 금자씨 2017. 10. 22.


몇 년 전  친구들과 집에 모여 만두를 빚어 먹었다. 그중 음식을 잘 하는 니나가 만두피는 한살림이 짱이라고 했지만, 미리 장을 볼 만큼 야무지게 준비한 것은 아니라서 다함께 망원시장에서 재료를 사왔다. 고기가 빠진 채식만두였다. 각자 두부를 으깨고 부추를 썰고 당근을 씻으며 수다를 떨던 중, 어쩌자고 내가 김치찌게는 역시 돼지고기가 자작하게 들어가야 맛있다고 했던 것일까. 입방정. 오두방정. 느자구.

그 중 정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내게 반문했다. "금숙, 채식하는 거 아니었어요?" 이미 채식을 그만둔 지 어연 10년은 된 것 같은데. 순간 이미 헤어진 연인의 안부를 묻는 친구의 질문에 답을 하는 듯했다. 우리... 실은 헤어졌어. 좀 됐어.  


우리 채식만두 빚고 있어요~

(기억은 안 납니다만...) 오래 전 페미니즘 교지를 함께 했던 시절, 후배인 그들이 육식을 할 때마다 얼마나 갈구었던지 결국 그 기수는 웬만해서는 모두 채식주의자가 되고야 말았단다. '동물에 관한 한 인간은 나찌다'라는 말을 읊어대며 『동물해방』, 『프랑켄슈타인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 류의 책을 강매하고, 육식주의와 가부장제의 관계에 대한 세미나를 했다나 뭐라나. 여전히 그들은 '나 보란 듯' 채식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밥벌이를 위해 동지로부터 등을 돌린 왕년의 혁명가처럼 그저 닥치고 앉아 만두를 빚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독일의 한 슈퍼마켓을 구경하다 채식만두를 빚던 그때가 생각났다. 유럽에서 가장 비건이 많다는 독일이었다. 유명한 젤리 브랜드 '하리오'가 수북이 쌓인 매대 위에 여러 종류의 '비건' 젤리가 보무도 당당히 놓여있었다. 젤리를 젤라틴 말고 뭘로 만들었을까! 우유 옆에는 우유보다 더 넓은 매대에 두유, 아몬드 우유, 캐슈넛 우유, 퀴노아 우유, 코코넛 우유, 오트밀 우유 등 비건 우유가 놓여 있었다. '구매하면 참 좋은 독일 쇼핑 목록'에도 올라온 독일산 '말 크림'은 말에서 뽑아낸 성분과는 하등 상관없는지 '비건 vegan'이 적혀 있었다. 숙소 조식에는 버터는 물론 비건 버터가 놓여 있었다.


캐슈넛, 마카다미아, 코코넛, 쌀, 아몬드 등 여러 비건 우유들

'말 크림'의 뒷면에는 비건 표시가!

참 다양한 비건 젤리들

숙소 조식에 나온 비건 버터

만약에 직접 빚어먹지 않아도 '하모니 마트'나 '코사 마트'같은 중간 규모의 슈퍼에 채식만두, 비건 우유, 비건 치즈, 비건 젤리, 비건 크림 등이 놓여있었다면, 웬만한 식당에서 비건 메뉴 하나 쯤은 쉽게 시킬 수 있었다면 나는 계속 채식주의자로 남았을까. 아닐지도 모른다. 구조 탓을 하기에 나는 고기를 너무 좋아한다. 주변에서는 고기를 일 년만 끊어도 남의 살을 씹는 느낌이 나서, 냄새가 이상해서, 설사를 해서 고기를 먹기 힘들다는데, 나는 고기 냄새만 맡아도 좋았었다. 치킨 집 앞을 지나치기가 헤어진 연인 집 앞을 지나듯 힘들었었지. ㅜㅠ 그래도,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채식주의자를 배제시키는 그 모든 상황 때문임을 수시로 되새기며 살 수는 있었을 것이다. 고기를 완전히 끊지는 못하더라도 세 번 중 한 번은 버터 대신 비건 버터를 골랐을지도 모른다. 우유를 집었다 내려놓고 대신 두유를 사오는 지금처럼. 영화 <옥자>를 볼 때의 감정이 슈퍼마켓에서 간간이 떠올랐을 수도 있다.  

낯선 곳은 '만약'의 세계를 보게 한다. 평생 북반구만 돌다가 남반구에 갔더니 초승달은 내가 알던 것과는 반대로 차오르고, 용변을 보고 물을 내리면 변기 속 물이 내가 알던 것과는 반대로 휘돌아 내려갔다. 내가 알던 세상과는 반대의 세계가 현현하고 있었다. '만약'을 겪어보거나 손에 잡힐 듯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하는 동력. 사람들은 그 동력을 찾아 낯선 곳을 여행한다. 독일의 한 슈퍼마켓에서 건진 것은 채 1유로가 되지 않은 팔뚝만한 초콜릿이 아니라, 오래 전 그만두었던 채식주의라는 일상의 혁명이었다.       



         

P.S 한국에 가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곱창볶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번 겨울 오랜만에 채식만두를 빚어볼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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