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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cursion

베트남의 사파에서 투명인간이 되었다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7. 3. 17.

   생방송 인터뷰에 참여했던 교수도, 진행자인 앵커도 웃게 만든 해맑던’ BBC 방송사고가 아시아 여성 내니(보모)’ 논란으로 번졌다. 소셜네트워크 반응을 보면 대개 한국인들은 인터뷰 도중 난입한 어린 자녀들을 끌고 슬라이딩으로 사라진 아시아 여성을 보고 ‘한국여자와 결혼했구나’로 생각한 반면, 대다수 소수세계 백인들은 보모로 생각했다. CNN보모로 단정짓고 트윗을 했다가 급히 수정하기도 했다. 이후 BBC는 이 가족이 모두 등장하는 인터뷰를 내보냈다. 


BBC 동영상 캡처 화면


   누군가 별 의도 없이 던진 돌을 맞고 개구리가 죽는다는 속담은 좀 오바스럽지만,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무심코 내뱉는 생각과 행동은 누군가를 상처 입힌다. 이런 일들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퍼낸 4대강 바닥의 모래알만큼이나 알알이 퍼져있다. 그러므로 많이 가졌으되 무식한인간들은 존재 자체로 민폐다. 세상을 못쓰게 만드는 나쁘고 부지런한 인간들은 무슨 의도라도 있지, 무식한 기득권들은 의도치 않게 불쑥 돌을 던진다. 누구든 편견을 가진 무식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싫기 때문에 비판이 나오면 대개 이렇게 변명한다. “세상이 원래 그래서 그랬어.”


   이화여대나 성공회대에 다니는 동남아 출신 여성들이 처음 만난 한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언제 결혼해서 한국에 왔냐?” 혹은 아이가 몇이냐라고 한다. 물론 국내에는 결혼 이주 여성들이 많다. 그리고 소수세계인 유럽과 북미 지역에는 아시안 내니들이 많다. 결혼 이주 여성도, 노동자인 보모도 아무 문제 없다. 다들 각자의 삶을 살 뿐이다. 위계화된 인종과 젠더의 범주로 한 인간을 고정시키는 것의 문제는 각자의 삶을 지우기 때문이다. 대개 많이 가지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계층의 사람은 범주화되지 않는다. 그들은 개인으로, 한 개체로 호명 받는다. 그래서 한국 남자들은 한남빡 친다’.   



아침 저녁으로 마시는 에그커피 


 계단식 논의 절경이 보이는 카페





한 일주일 머물며 처묵처묵에, 산책을 실컷 즐긴 후 남들과 함께 가는 트레킹에 나섰다.  


   마흔을 앞둔 30대의 마지막 생일을 베트남 고산마을 사파(Sapa)’에서 홀로 보냈다. 이미 혼자 갈 수 있는 트레킹 코스는 산책 삼아 다녀왔겠다, 에그커피도 질리도록 마신 터라 혼자 가기 힘든 트레킹 코스를 신청했다. 여행사 이름은 사파 언니들의 트레킹(Sapa Sisters’ Trekking). 이름만으로도 너는 콜


   트레킹 당일 여행사 앞에 갔더니 8명 정도의 신청자들이 모여있었다. 신청자는 나만 빼고 모두 백인이었다. 그 중 쾌활하고 사교적인 백인 여자가 트레킹 참가자들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핀란드에서 왔고 지금 동남아 여행 중이고 베트남은 며칠 머물렀고, 여기 계단식 논 정말 어메이징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며 한 명씩 악수를 청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기 이름은 뭐고 어디 출신이고, 하던 중 그 핀란드 여자가 나만 쏙 빼놓고 악수를 돌림빵하는 것이 아닌가. 아시아인이라는 사실만으로 나는 투명인간이 돼버렸다. 내가 손을 내밀며 나도 오늘 트레킹 같이 하는데라고 입을 떼자 다들 무안해했다.



 여행사 '사파 언니들의 트레킹'


  함께 트레킹 길을 걷는다.


 내 트레킹 파트너



 비가 와서 질척질척하고 미끄덩한 길을 걸었다.

자빠지지 않으려고 온 정신을 집중하며 걷다보며 어디선가 누군가 자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생활의 달인... 쓰레빠에 아이들 들쳐 엎고도 트레킹 잘만 하신다!


자빠졌고 물이 있으니 씻어야지 어쩌겠으


트레킹 도우미 언니가 만들어주신 작은 꽃수레


   아마 그녀는 어떤 나쁜 의도도 없었을 것이다. 나를 베트남 여행사에서 일하는 현지 스태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사파 언니들의 트레킹직원은 모두 베트남 여성들이다. 나는 그들과 트레킹을 잘 끝내고 숙소로 돌아왔지만, 트레킹 내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치통에 시달렸다. 아무렇지 않은 날이었고 몸 컨디션도 괜찮았는데 갑자기 이가 아파서 단단히 썩었구나, 싶었다. 치통이 며칠 더 계속되면 몸이 중헌께 예정보다 일찍 귀국해 치과를 다닐 생각을 했다. 그런데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치통이 싹 사라졌다. 이런 신기할 수가. 내 이빨이 그 날의 치욕을 견뎌내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 전에 여행객들의 트레킹을 돕던 사파 여성들의 쓰레빠를 생각했다. 그녀들은 여행객들을 돕는 대가로 수공예품을 팔아 아이들을 키우고 먹이고 재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고산마을 속 그녀들의 인생도, 언니들의 트레킹에서 스태프로 일하던 현지 직원도 쓰레빠와 수공예품으로만 기억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녀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그리고 나도, 핀란드 여자도 각자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문제는 베트남 노동자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지워지고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는 것에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네가 누구든, 어디에 있든서로에게 자기 소개를 건네는 다정한 애티튜드가 필요하다. 신경성 치통을 예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누구든 상대적으로 많이 가질 수 있고 더 적게 가진 사람을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 취급할 수 있으므로, 이 포스트는 나 스스로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