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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 day

엄마의 당일특급 스티로폼 박스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7. 6. 20.
     퇴근하고 돌아오니 흰색 스티로폼 박스가 현관문 앞에 놓여있다. '당일특급'이라는 중요한 표식을 몸에 붙이고서. 나는 그 스티로폼을 노려보다가 결국 집으로 들였다.

  
     아침에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일찍 퇴근해 바리바리 싸보내는 반찬들 어여어여 냉장고에 넣으라고 말이다. 이미 이 주 전, 엄마 집보다 훨씬 작은 우리 집 냉장고는 차 있고, 알아서 반찬 잘 해 먹고 있으며, 저번에 보내주신 김치가 여태 남아 더이상 쟁여놓을 곳이 없다는 통화를 했었다. 말 안 통하는 '진상' 손님에게 회사 원칙을 반복해서 말하는 콜센터 직원처럼 몇 번의 통화에서 나는 그 말을 계속 했었다. 결과는 우체국 당일택배를 붙인 다음 사후 통보.

     '그럼 맛있게 먹으면 될 거 아냐', 라는 내 룸메이트는 이 절망감의 요지 따위는 모를 것이다. 이 스티로폼 박스를 받느냐 마느냐는 엄마와 딸의 기 싸움이자 영역 다툼이자, 제발 내 방식대로 살게 해달라는 딸들의 저항이자,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받아들여달라는 애원이자, 상대방의 존재를 지우는 자기 방식대로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고통이라는 것을 말이다. 엄마와 딸의 갈등 유형이야 다양하지만, 나를 비롯해 내 주변에는 '내가 사라져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엄마의 사랑'에 주기적으로 발작하는 많은 딸들이 있다. 나에게는 이 스티로폼 박스가 그렇다.

     관절염이 있는 손으로 야무지게 매듭을 지어 행여나 터지지 않도록 비닐봉지를 두번 씩 싸놓은 정성, 택배가 가는 동안 쉴까 걱정돼 떡과 국을 얼리고 그 위에 아이스팩을 올려놓는 마음, 이제 막 담은 전라도 김치를 맛보이고 말겠다는 새김치의 냄새 (전 신김치만 먹습니다만), 그리고 나를 폭발하게 했던 엄지 손톱에 열 개쯤 올라갈 자잘한 크기의 다슬기 알갱이들. (이걸 핀셋으로 하나씩 까고 국을 끓이고 한 번에 먹을 수 있도록 세 덩어리로 나눠서 얼려서 보내신 거죠?)

    
     아아, 어머니의 은혜 이런 노래 절로 나오는 심정 아니고, 미치고 환장하겠다. 그 사랑이 지긋지긋하고 부담스럽고 죄책감에 짓눌리게 한다. 그러나 그렇게 환장하게 사랑받아서 사람으로 커왔음을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내가 조금이나마 좋은 사람의 구석을 간직하고 있다면 -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지하철에서 몸이 힘든 사람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뺏앗기고 지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프고, 때때로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 아마 팔 할은 이 사랑 때문일 것이다. 

     그치만 내가 아이가 있다면 좀더 쿨내나는 사랑을 하고 싶다. 뭐가 필요한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느낌인지 촉수를 뻗어 알고 싶고, 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마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내가 변하는 고통을 감내하고 싶다. 결국 모든 자식들의 소실점은 누구와도 같지 않은, 한 존재로서의 독립이니까.

     그런 거 말이 쉽지 어렵다고요? 맞습니다, 맞고요. 그래서 아이 없이 이런 드랍만 ㅋㅋㅋㅋㅋㅋ


어머니의 각혈 같은
울음이 그치고
비수를 쥔 듯
연필 하나 쥐고
종이 하나 달라고 보채셨는데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문맹으로
피를 찍듯 가나다를 연습해서는
3년 만에 딱 한 장 딸에게 쓴 편지
"내말 잇지마라라
주글대까지 공부하거라
돈 버러라
에미갓지 살지 마라라
행볶하여라"
종이 위에 쏟은
어머니의 비릿한
각혈 한 덩어리

신달자 <각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