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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 day

[영화] 콜미바이유어네임, 그리고 120 BPM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8. 3. 26.


백수로 놀던 시절은 인디언 써머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새 출근을 코 앞에 두고 계절의 끝물에서 마주한 제철과일을 먹는 심정으로, 평일 대낮에 영화를 봤다. 한 주에 아름다운 퀴어영화 두 편을 보다니, 이 영화들은 존재만으로도 내 백수인생의 끝자락을 축복해준 거다. 현재 내 플레이리스트는 'mystery of love'와 'visions of Gideon' 그리고 'smalltown Boy'로 점철돼있다. 각각 <콜미바이유어네임>과 <120 BPM>의 주제곡들이다.


<콜미바이유어네임>은 여러 모로 <캐롤>의 게이 버전이랄까. 내게 두 영화는 데칼코마니 같다. 둘 다 황홀하게 아름답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스크린을 관음하는 완벽한 미학이랄까. <캐롤>에는1950년대의 레트로 미국, 필름 카메라, 모피, 담배 연기, 담배를 말아쥐는 손길, 눈빛이 있다. <콜미바이유어네임>에는 이태리 여행병에 걸리게 하는 이태리 시골 풍경, 유럽식 식사, 조각상, 피아노, 자전거, 여름의 몸들이 있다. 캐롤은 모피와 담배로, 올리버는 랄프 로렌과 '아메리카~노' 캐쥬얼로 캐릭터가 완성된다. <캐롤>을 본 후에는 인조모피 외투를 검색하고, <콜미바이유어네임>을 본 후에는 로마나 피렌체 행 비행기 표를 찾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공들인 미장센과 애써 설명하지 않은 여백을 통해 사랑의 언어들이 찬란하게 빛난다. 

  




<콜미바이유어네임>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올리버와 헤어지고 난 엘리오에게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스쳐 지나게 하지 말고 간직하라는 아버지의 말이다. 엘리오의 아버지는 이렇게 대화를 시작한다. "너는 이런 말을 가장 나누고 싶지 않은 사람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너무 멀리 간 걸까. 더 이야기해도 되겠니?" 감정을 억누르고 살다가는 서른이 넘어서 마음이 은행의 파산 선고 같은 것을 받게 될 거라고, 지금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기억하라는 말. 엄마도 아시냐고 묻는 엘리오에게 "아니, 엄마는 모르실 거야"라고 답하는 아버지.  


한편 엘리오의 어머니는 미국으로 떠나는 올리버를 배웅하라고 엘리오를 '일부러' 딸려 보내고, 둘은 그렇게 마지막 여행을 하게 된다. 그녀는 올리버가 떠난 기차역에서 홀로 눈물을 쏟는 아들을 차에 태워 집에 데려온다. 여행을 보낼 때도, 데리고 돌아올 때도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 그저 옆에서 사랑을 앓는 자식을 지켜봐주고 지켜줄 뿐이다. 그리고 그 해 여름이 지나고 펑펑 눈이 오는 날, 내년 봄에 결혼한다는 올리버의 전화에 엘리오의 부모는 축하한다고 말한다. 엘리오가 부모님이 우리 관계를 안다고 하자 올리버는 이렇게 답한다. "너는 정말 좋은 부모를 뒀구나. 우리 부모님은 정신병원에 보냈을 거야. 그런데 아실 것 같았어. 그때 교수님이 나를 대하는 것이 가족 같았거든. 나를 사위 대하듯 하셨어."  


이미지 출처| https://brunch.co.kr/@infinitolee/18 


  

요즘 퀴어영화에 나오는 멋진 부모들 덕에 넋이 빠질 지경이다. <120 BPM>에는 에이즈로 죽은 아들의 '정치 장례'를 위해 아들의 유골을 치료제 보급을 거부하는 제약회사에 뿌리는 것에 동의하는 엄마가 나온다. 단체 활동가들이 조심스럽게 아들의 유언에 따라 유골을 써도 되겠냐고 묻자, 그녀는 그래도 조금은 아들의 유골을 가지고 싶다고 답한다. "2:8 정도면 어때요?"라고 엷게 웃으며. 집에서 죽은 아들의 마지막을 배웅하러 온 <액트업 파리>의 활동가들에게 빵과 커피를 건네주며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모두들 이렇게 한 곳에 모이니 보기 좋네요." 관객 3명이서 봤는데, 나도 울고 다른 두 명도 울었다. 눈물로 대동단결... 알고 보니 우리만 그런 건 아니었다. 칸영화제 프리미어 상영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영화를 보고 30분간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120 bpm>은 2017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탔다.   



고백하자면 <캐롤>, <콜미바이유어네임>은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영화지만, <120 BPM>만큼은 아니었다. 세 영화 모두 상상마당에서 봤는데, 앞의 두 영화는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관객이 많았던 반면, <120 BPM>은... ㄷ ㄷ ㄷ (이미 말하지 않았냐고. ㅠㅜ) 흥행도 안 되고 네이버 영화 평점에는 '지들이 에이즈 걸려놓고 왜 정부와 제약회사에 난리야'라는 댓글과 펑점 테러가 난무한다. (그렇다면 메르스와 사스 바이러스성 전염병은 모두 개인 탓입니다만) 이 영화를 수입, 배급해준 회사에 무한한 감사를 바친다. 이런 영화를 개봉관에서 보게 되다니 더이상 변방의 코레아가 아닌 것 같아 마음 속에서 국뽕이 무럭무럭 솟아날 정도였다. 당신들 덕에 내 백수생활의 대미를 여행 없이도 제대로 보냈어요.


<120 BPM>은 <콜미바이유어네임>처럼 유토피아 배경 속의 아련한 첫사랑, 등골의 진뜩한 땀방울마저도 스님 몸에서 나온 영롱한 사리처럼 보이게 하는 환상이 없다. <콜미바이유어네임>에 대해서 한 비평가는 이렇게 평했다. "나에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미학적인 완벽함이 감정의 축적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세계는 너무나 빛나고 완벽해서, 이건 인생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영화처럼 보인다. 구아다니노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건 완벽하게 황홀한 세계다. 하지만 인물들의 아름다움과 지적 완벽함이 너무 유려한 나머지 나는 이들이 실제로 성기를 가지고 있기는 한 건지 믿지 못하겠다. 혹은 그들이 우리처럼 땀을 흘리거나 햇볕에 그을리기는 하는지도.” 


(장영업, 씨네 21 기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욕망 3부작 중 마지막 영화' 재인용.

기사 읽기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9696https://www.naver.com&utm_source=dable&utm_source=dable&utm_source=dable&utm_source=dable&utm_source=dable&utm_source=dable&utm_source=dable&utm_source=dable 



이미지 출처|  https://brunch.co.kr/@moviemon94/31


반면 <120 BPM>의 주제인 '액트업 파리'의 활동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흥부자' 게이들이 실로 사랑해 마지 않는 120 비트의 음악과 클럽씬이 그려진다. 하지만 클럽의 조명에 부유하는 먼지가 바이러스와 세포의 모양으로 변형되는 씬, 클럽의 먼지와 유골의 재가 겹쳐지는 듯한 상상, 죽어가는 시간 속에서 풍경은 더 많은 색깔을 갖게 되고 생은 압축적으로 감각되는 것을 보여주는 파리의 거리, 센 강이 빨간 색 피로 뒤덮여 흘러가는 씬 등은 정말이지 대.다.나.다. 

(고독한 예술가들, 1980년대 액트업 활동의 의미와 죽음에 대해서는 올리비아 랭의 <<외로운 도시>>에 처연하게 그려져 있다.)


영화가 얼마나 세심한지 <액트업 파리>가 회의할 때 수화 통역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렇게 게이뿐 아니라 레즈비언, 혈우병 환자, 십대 에이즈 양성인과 그의 엄마, 장애인 활동가를 보여준다. 병을 앓다 죽은 주인공 '션'의 바지를 벗기자 기저귀를 찬 모습이 휙 지나간다. 온 몸이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하는 션을 그의 남친이 자위해주는 병원 씬은 클럽씬의 모습처럼 생명이 사그라드는 과정에서도 우리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웅변한다. 그런 그였기에 마지막으로 션에게 안락사를 선사한다. 


근래 이토록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텍스트는 두껍고 사랑은 절절하고 영상적으로 아름답고 섹스 씬이 야하고 (비엘 저리 가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한 영화는 없었다. 당췌 왜 3명만 본 거니.. ㅠㅜ 아주 만국민 다 봐야써. 재벌이 돼서 영화표 무료 보급하고 싶으다. 영화 내려가기 전에 한 명이라도 더 보라고 굿하는 심정으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