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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cursion

모로코, 바르셀로나, 그리고 라이프스타일로서의 민주주의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6. 8. 23.

웬만해서는 돈에 쪼들릴 수밖에 없는 유럽을 돌아다니다 물가가 싼 나라에 오면 무더운 여름철 시원한 에어컨이 빵빵 터지는 카페에 들어온 것처럼 숨통이 좀 트인다. 특히 북유럽 지역은 물 한잔 시키기도 무서운데 오죽하면 미국 여행작가(얼마 전 영국 시민권을 땄다고 하니 이제 영국작가이기도 하려나?) 빌 브라이슨이 <<발칙한 유럽 산책>>에서 노르웨이에서 숙박비를 계산하려면 은행 ATM에서 돈을 뽑아 리어카에 실어와야 한다고 농을 치지 않았던가. 하물며 미국만큼 잘 사는 나라도 아니고, 게다가 한국에서도 저임금 생활자인 나는 어쩌라고.

 

그래서 유럽에서 북아프리카의 모로코로 내려갔을 때 뜨거운 햇살과 해변을 찾아 스페인 남부에 모여든 그 바글바글하던 관광객들이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여기도 아름다운 해변에 일광욕하기 부담스러울 정도의 (이건 아시아 기준이고 유럽인들이라면 분명 다 벗고 온몸으로 맞고 싶어할) 햇살이 내리쬐고 스페인에서 아주 살짝 내려오면 되는데, 뭣보다도 스페인에서 쓰는 돈의 30%만으로도 훨씬 좋은 숙소와 식당에 갈 수 있는데 왜 여기가 아니라 거긴 거지? 물론 지중해에 접한 북아프리카 해변가에는 많은 유럽인들이 휴양 여행을 온다지만, 내가 체감하기에 그 규모가 스페인 여행객과는 잽이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모로코가 이슬람 국가라서 마음대로 술을 못 마셔서 그럴 거라고 지레 짐작했다. 외국인들이 많이 들락거리는 숙소에서는 술을 팔지만 베를린이나 마드리드의 일상(?)처럼 술병들고 놀러다니면 큰일나는 분위기. (외쿡인들에게 휴가란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홀짝홀짝 술 마시면서 일광욕하기 아니겠으?) 그 이유도 있겠지, 하지만 10일 정도 모로코를 여행한 후 왜 모로코가 아니라 그 비싼 유럽에서 휴가를 보내는지 감이 왔다. 나야말로 정작 ‘뭣이 중헌지’도 모름시롱 물가 타령이나 했달까. 


그 '감'을 소설가 김영하 씨의 말로 하자면 이렇다. <<여행자, 도쿄>> 중에서 발췌.  

어떤 억제된 에너지가 착 가라앉아 있는 듯한 도쿄의 거리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바로 개인의 존재이다. 도쿄는 근대 이래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문제적 개인들을 포용해온 유일한 도시였다. 무정부주의자, 동성애자, 범죄자, 펑크족, 공산주의자, 테러리스트, 마약 중독자들이 도쿄에서 드디어 살 곳을 찾았다. 나는 도쿄 시민들이 갖고 있는 그 정신을 ‘유쾌한 무관심’이라 부를까 한다. 무엇이든 받아들이되 그것에 대해서는 적당한 거리와 무관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해마다 관광지 탑 10의 절반 이상을 유럽 국가들이 채울 정도로 유럽은 인기 많은 여행지이다. 마포 '민중의 집'에서 올해 여름 내건 프로그램 이름도 "유럽보다 마포"였지. (캬~ 쥑이는 네이밍) 켜켜이 역사가 쌓인 건물과 유수한 박물관들, 여유롭고 자유로운 분위기 등 많은 이유가 있지만, 모로코에서 바로셀로나로 옮겨왔을 때 새삼스레 깨달았다. 개인의 존재가 인정되는 도시란 얼마나 멋진가. 적당한 거리와 무관심이 공기처럼 흐르는 도시는 개인을 자유롭게 한다. 공원과 광장과 ‘유쾌한’ 무관심은 도시가 여행객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배려다. 그렇게 많은 여행자들이 유럽을 찾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를 맛보고 싶어서가 아닐까. (물론 유럽도 구린 구석이 엄청 많다. 지구상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아마 내 평생 모로코 메르가주 사막에서 바라본 밤하늘만큼 우주를 실감하는 압도적인 경험은 못 할 거 같다. 9,000여 개의 골목길이 개미집처럼 연결된 페즈의 메디나보다 더 꼬인 미로는 못 만날지도 모른다. 사막투어와 페즈만 따져도 모로코는 여행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지랖 떠는 남자들을 견디는 일에 휴가를 바치고 싶지 않다. 발걸음마다 따라붙는 호객행위와 흥정이 무서워 쇼핑을 포기할 만큼 바가지를 씌우는 관행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뭐 그런 것들이야 돈 쓰러 온 관광객에게 따라붙는 수수료 같은 거 아닌가. 여행 한두 번 하나. 자기들끼리도 오지랖이 넓은 문화라는 거, 외국인에게 관심이 많다는 거, 안다. 나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 올라와서 제일 신기했던 게 외국인이었고, 흑인을 보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넘나 이국적이라 훔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촌스러워서 미안합니다.)


이렇게 질질 끌면서 남의 나라 흉을 본 이유는 ‘한남충’ 기사에 빡 쳐서다. 모로코 자리에 비키니 입고 해수욕장 갔더니 강제로 껴안고 사진 찍어대는 놈들을 만난 인도를 넣어도 된다. 특정한 나라를 ‘디스’하는 게 아니라 그런 문화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곳, 그런 짓을 한 ‘똥파리’들이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곳을 생각한다. "오사카 여행가면 일본 여성에게 길거리 헌팅 좀 하지 마세요" (기사 보기 http://www.insight.co.kr/newsRead.php?ArtNo=70850)를 읽으며 모로코에서 느꼈던 불쾌감이 되살아났다. 

      

모로코에서는 제 3자의 시선으로 이런 것들이 좀더 잘 보였다고나 할까. ‘오지랖’을 떠는 주체가 모두 남자라는 사실, 그곳에서 나란 존재가 인간 아래 여자로만 취급된다는 사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외국인에게도 관심이 많다 해도 그곳 여자들은 훔쳐볼 뿐, 함부로 타인의 경계를 넘지 않는다. 모로코에서 사뿐히 ‘즈려 밟는’ 발걸음마다 말 시키고 아는 척 하는 사람들이 따라 붙었는데, 99.9%가 남자였다. 딱 한 사람 한국어를 전공한다는 모로코 여대생만이 ‘안녕하세요’라고 먼저 아는 척을 했었다. 내가 여자라서 남자들만 말을 시킨 거라고? 잠시 남자 여행객과 같이 다녀본 경험 상 거리에서 남자들에게 말 걸고 오지랖 떠는 사람들도 역시 남자들이다. 아아, 원정 가서도 그러고 지네 나라에서도 그러고 잘났으 증말. 


한가지 더, 여성성과 남성성을 확연하게 가르고 그 관념 안에서 작동하는 사회는 넘나 피곤하다. 여행을 같이 한 내 친구는 머리가 짧고 키가 큰데 여자냐, 남자냐, 도대체 결혼은 어떻게 하냐, 아주 난리가 났다. (너나 잘하세요.) 화장실 앞에서 돈 받는 사람이 자꾸 남자 화장실 들어가라고 한다. -_- 머리가 긴 내가 화장실 같이 들어가서 ‘지켜줘야’ 한다. 백미는 페즈의 공항에서 일어났다. 공항 검색대에서 몸 수색 할 때 여자들은 여자 검사원이, 남자들은 남자 검사원이 한다. 그런데 내 친구는 여자 검사원이 주저하다가 남자 검사원으로 변경되었다는 거. 아놔. 이런 곳에서 끼 부리는 게이오빠와 건장한 왕부치 언니는 어떻게 살라는 거지? 


서로 다른 존재의 거리감을 인정하는 것,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다가가지만 먼저 선을 넘지 않는 배려가 라이프스타일로서의 민주주다. 민주주의는 서로를 평등하게 바라보며 개인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자란다. 그러므로 노골적으로 개인을 짓밟는, 그리고 가장 큰 인구 집단인 여성을 사람(남자) 아래의 인종으로 대하는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성숙하기도 어렵다.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이룰지언정 (한국처럼) 라이프스타일로서의 민주주의는 요원하다. 김호 씨는 <<나는 왜 싫다는 말을 못 할까>>라는 책에서 “매일매일 가정, 학교, 직장의 삶 속에서 민주적 라이프스타일을 살 수 없다면 진정한 정치적 민주화도 어렵다”고 썼다. 동감이다. 요는 민주적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건데, 이는 개인이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모로코 사막에서 밤하늘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었다. 최선을 다해 내가 나인 채로 살아가려고 하는 몸부림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던가, 그리고 최선을 다해 모든 개인의 존재가 평등하게 인정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몸부림이 민주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던가. 가 닿을 수 없는 유토피아적 이상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몸부림을 노골적으로 외면하는 사회에서 과연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만약 다음에도 해외에 나올 수 있다면, 모로코의 에사우이라가 아니라 게이 ‘4인 가족’들이 입양한 아이들을 데려와 수영하는 바르셀로나의 시체스 해변을 휴양지로 택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