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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는 친구의 혼수선물로 찔러주고픈 <<풀잎은 노래한다>>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6. 2. 13.


유명한 작가들, 특히 상 좀 탔다는 작가들 책은 젠체하기 위해 어거지로 끝까지 읽은 적이 많다. 들춰본 볼라뇨의 책을 통털어 '후장사실주의자'라는 말만 좋았고, 대학 교양수업시간에 레포트까지 써 낸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은 내 머릿속에 마법적 리얼리즘이 들어찼는지 주인공 구분이 안 되고, 필립 로스의 책은... 이렇게 막 나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성적 판타지를 써대기만 해도 대가라 불리는군, 싶어 맥이 풀렸다. 배낭여행 때 도미토리에서 마주치는 좀 지적이고 견문 넓은 외쿡의 젊은이들이 하나같이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들먹이는 통에, 17분씩 끊어서 일주일 (주 5일 기준!)에 걸쳐 숙제하듯 봤다는 일화가 생각났다. 그러니까 유수의 문학상을 타거나 세계문학전집에 이름을 올린 작품은 내게 문학판 <봄, 여름, 가을, 겨울>이었던 셈. <<마담 보바리>>를 끊어 읽은 기억이 선하다. 이렇게 잘난 척 하고 싶을 때 써먹으려고 오늘치 분량을 정해놓고 어거지로 읽었나. ㅋㅋ 


그런데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탄 작가의 작품을 새벽까지 읽는 사태가 일어났다. 온전히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만을 위한 BL만화와 소설을 제외하면 하루키가 아니라 하루키 할애비의 책을 읽어도 자정 전에 자고 마는데 말이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후 노란 조명의 스탠드를 켜고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풀잎은 노래한다>>를 호기롭게 펼쳤다. 배도 부르고 따뜻한 차와 병아리 색깔의 조명은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우고, 그리고 슬슬 잠이 오겠지. 하루의 끝이 이렇게 순조롭고 고요히 끝나가는 것에 대해 아쉬우면서도 행복한 기분에 휩싸여 잠이 드는 삶이란 얼마나 무사한가. 그러나 그날 밤 새벽 3시까지 도레스 레싱의 책을 단숨에 읽었다. 한 줄 감상평? 결혼식 때 '가방 모찌'를 해줄 만큼 친한 친구의 가방에 혼수 선물로 넣어줄 테다! 아마 내가 사랑하는 친구라면 불행한 결혼 생활을 세밀화 묘사하듯 그려놓은 이 책을 읽으며, 너인 채로, 그리고 그 사람인 채로 행복하게 합치되기를 바라는 내 마음을 이해해줄 거였다.   






소설의 주인공인 메리와 리처드 같은 타입을 나는 얼마나 싫어하던가. 크게 나쁘지 않고 나름 자기 취향이 있는 듯한 평범한 개체, 다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탐구하지 않은 채 어른이 된 사람들. 이런 타입들은 개인으로 존재할 때는 스스로 그닥 불행하다고 느끼지도 않고 그럭저럭 살아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서로에게 존재를 내맡긴 채 파트너에게 자신의 행복을 청구하는 결혼에 이르면 서로의 지옥이 된다. 그러니까 타인과의 합치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려는 '노오력'을 먼저 거쳐야만 한다. '똥파리' 같은 이상한 인간 좋다고 연애 삼매경에 빠졌다가, 먼훗날 그런 사람을 만났다는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은 '흑역사 연애'가 의미가 있다면 바로 나란 인간을 들여다 볼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나를 모르는 채 타인을 떠맡으면 서로가 서로를 불행으로 몰아가는 죄를 짓게 된다. 메리와 리처드는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롭고 들뜬 감정에 취해 자기가 만들어낸 상을 상대방에게 투여해 사랑에 빠졌고, 사회가 부여한 결혼상에 맞춰가면서 파멸한다. 이 복장 터지는 상황을 개미 똥구멍 세밀화 그리듯 묘사해놓았는데도, 나는 그들을 이해했고 전혀 미워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마음이 짠했다. 새벽 3시에 잠에 들면서도 마음이 짠, 했다. 소설이 나온지 한참 지났지만 이 얼마나 주변에 널린 평범한 부부들이란 말인가. "생각하는 바가 서로 다르고 이상 또한 맞지 않는데도 이럭저럭 결혼해서 서로가 원하고 서로의 생활 패턴이 요구하는 많은 것들의 차이로 상대방을 비참하게 만드는 부부들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말이다." (95쪽) 나는 우리 부모님을 보며 이런 느낌을 받곤 했지, 아마. 어쩌면 대부분의 불행한 결혼생활은 이중의 고독에 익숙해졌기 때문일지도. "그들의 결합이 전적으로 잘못되었고 그들 사이에 사실상 이해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리처드는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어떠한 결혼이든지 이중의 고독을 잉태한다는 사실에 익숙해졌다고 볼 수 있었다." (185쪽) 


아프리카에 초기에 정착한 백인들은 인종차별이라는 개념 자체가 서지 않는, 스스로의 존재 자체로 지독히 인종차별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비록 백인들의 세계에서 외면받고 실패를 거듭하고 있지만 어쨌든 메리와 리처드는 남아프리카 백인들의 첫 번째 규율, 즉 ‘너희는 동료 백인이 일정 수준 이하로 (원주민과 구별되지 않는 수준 이하로)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된다”에 속한 백인이었다. 그에 합당하게 그들 역시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모세'라는 흑인이 등장한다. 메리의 채찍질에 얼굴에 상처가 남은 모세는 농장 노동자에서 메리와 리처드 집의 하인으로 착출된다. 육감적이고 은밀하고 엄혹하고 단단하고 무섭고 자신만만한 모세, 백인인 메리와 흑인이자 원주민인 모세 사이에 그 세계에서 있어서는 안 될 권력 관계의 역전이 일어난다. 


모세에게 의존하면서 이 세계와 제 정신을 이탈한 메리에게 농장 일을 배우기 위해 백인 젊은이 '토니'가 나타난다. 토니는 "인종차별 폐지에 대해서 습관적으로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사리사육과의 갈등에서 거의 살아남지 못하는 이상주의자들의 피상적인 진보적 사고방식(311쪽)"을 가진 이제 막 아프리카에 도착한 영국인이었다. 그를 통해 잠시 백인 세계로의 구원을 요청한 메리는 그 댓가로 죽음을 맞는다. 만족스러웠던 비혼 직장 여성의 삶을 누렸음에도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묻지 않은 삶, 마지막까지 타인을 통해 구원받기를 바랐던 삶이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도대체 뭘 하며 지내왔기에 윤곽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없다. 그녀가 사악한 그 무엇에 대해 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끌려 다니기만 했을 뿐, 자발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 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결국, 갈수록 의지를 상실하다가 마침내는 이 지경이 되어 냄새나는 낡은 소파에 앉아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333쪽)


도리스 레싱은 결국 우리들에게 이 말을 하기 위해 소설을 쓴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녀의 말은 여전히 유효해서 나는 새벽까지 메리의 이야기를 읽고, 더 많은 여자들이 그녀의 소설을 읽기를 간절히 원했다.    


"혼자서 그녀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녀가 배웠어야 할 교훈이었다. 오래 전에 그 교훈을 깨달았다면, 그녀는 지금 이곳에 서 있지도 않고, 자신의 책임을 대신해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될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힘없이 의존함으로써 다시 한 번 배반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343쪽)


스웨덴 한림원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도리스 레싱을 선정하면서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회의주의와 열정, 그리고 공상의 힘으로 분열된 문명을 통찰한 서사시인”이라고 말했는데, 고개를 끄덕끄덕. 서사가 가진 힘이란 이렇게 대단하고, 문학상이란 것도 헛 것은 아니었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