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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 우리 손에 책이 쥐어져 있는 시대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5. 9. 13.

책이 없다면, 마음이 망부석이 될거야 




신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에서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식도암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자신을 낯설어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건강한 시절 청력과 시력을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목소리를 잃는다는 것은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고 말이다. 

우선은 '건강한 일반인'의 나라에 속해 있는 나 역시 

목소리를 잃는다는 것은 아예 아웃 오브 안중이었지만, 

불의의 사고나 노화로 시력을 잃게 된다면 

그 컴컴한 시절을 어떻게 견뎌 나가야 할지 혼자 비극에 빠져들던 순간이 있었다. 

나는 읽고 싶은 책이 소파나 침대 위에서 기다리는 와중에, 

커피를 쪼르르 내려 책 읽을 채비를 하는 순간을 가장 애정애정한다. 

그런데 만약 그런 순간들을 인생에서 탈각시켜야 한다면. 


이후 도서관 서가 한쪽에 얌전히 꽂혀있는 점자책들이 눈에 들어왔고,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뒷면에 나온 

'이번 호 작아를 읽어주실 분들'(녹음하여 필요한 곳에 전달한다) 알림판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암튼 책 없이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라고! 

마음이 망부석 되는 거 아녀?

  

책이 불타는 온도, 화씨 451의 세계 

 

책이 불타기 시작하는 온도는? 

화씨 451도 = 섭씨 232.8도. 

모두가 사방을 둘러싼 벽면 TV의 인물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친적으로 껴안고, 

깨어나 있는 시간은 물론 잠자는 램수면의 순간까지도 

귀에 끼는 이어폰에 의존해 살아가는 

미래의 어느 시대. 

심지어 귀이어폰을 낀 상태에서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자살을 시도하다가 깨어나도 

자기가 죽으려고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성능 좋은 난연제로 인해 더 이상 화재가 나지 않는 시대에 

불을 끄는 소방수는 책을 태우는 방화수로 거듭 난다.

'뭘 평가하고 등식화하고 우울하게 만들고 

자기 나름의 책임감을 지우는 것'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책을 가지고 있다는 고발이 들어오면 

책 뿐 아니라 집 전체를 태우는 

'화씨 451'의 업무를 맡은 방화수 리더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을 얽어매려고 철학이니 사회학이니 하는 따위의 

불안한 물건들을 주면 안 돼. 

그런 것들 것 우울한 생각만 낳을 뿐이야. 

지금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이, 

벽면 텔레비전이 달린 아파트를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우주를 계산하고, 평가하고, 등식화하려는 사람보다 더 행복해. 

뭘 평가하고 등식화한다는 것은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외롭게 만드는 일일 뿐이라고.” 

(103쪽) 


자기 나름대로의 책임감, 자기 손으로 직접 하는 생활  


그 방화수 중 한 명으로 일하던 주인공은 우연히 클라라세라는 

책 읽고, 걷고, 사람과 대화하고, 손으로 사물을 만지고 느끼는 '불온'한 소녀를 만난다. 

그리고 그녀와 그녀의 불온한 가족은 어느 날 갑자기 조용히 삭제된다. 

사라졌던가 아니면 제거되었거나. 

클라라세는 사라지기 전까지 방화수와 동네를 거닐면서 별난 가족의 생활을 이야기한다.  


“아, 그냥 엄마랑 아빠랑 삼촌이 둘러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거예요. 

‘걸어 다니기’를 고집하는 사람들하고 비슷하죠. 

더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 (생략)

걸어 다녔다고 잡아갔어요. 우리 가족들 되게 별난 사람들이죠?” 

(25쪽)


“지금은 그때와는 너무 다르죠. 

삼촌 말대로 지금은 자기 나름대로의 책임감을 느꼈던 시대와는 달라요. 

아시죠? 저는 책임을 느껴요. … (생략)

물건 사는 일이나 청소하는 것 모두 제 손으로 직접 해요.”

(56쪽) 


클라라세의 만남은 책을 태우는 방화수의 마음에 불을 질러, 

급기야 방화수가 책을 태우러 간 집에서 몇 권을 책을 빼돌려 집에 감추고

귀이어폰을 끼고 벽면 TV의 친척들과 대화하는 아내에게 이렇게 소리치게 만든다.


“혼자 있게 해달라고! 그래 좋아. 

그렇지만 나는 뭐가 되는 거지? 

우린 혼자 있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 

우린 적어도 가끔씩이나마 서로를 성가시게 해 줘야만 해. 

우리가 정말로 상대방에게 진지하게 관심을 가져 본 게 도대체 얼마나 됐지? 

정말로 중요하다고 느끼면서, 정말로 진지하게 말이야!” 

(89쪽) 


그리고 변방에서 '원시적'으로 생활하는 소수의 '책 사람들' 영토로 쫓기는 여정,

결국 그곳에서 전쟁의 위험조차도 귀이어폰에서 새어나오는 행복으로 덮은 채

핵 전쟁으로 말소된 사회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핵구름을 바라보는 장면까지,  

디스토피아가 그려진다. 


책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까? 




학교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동네 책모임을 하는데 그곳에서 이 책을 읽었다. 

프리모 레비가 가라앉은 자, 구조된 자 에서 언급해서 단박에 골라 읽었는데, 

책모임 내내 성토가 이어졌다. 

아니, 뭐가 이렇게 작위적이고 스토리텔링 허접해? 

역쉬 상 탔다고 좋은 작품은 아니다!

아, 빨랑 중고책으로 팔아야지, 괜히 샀어!! 

물론 나도 동의.

그런데 편집은 영 허접하고 이음새 초짜 같은데 고갱이는 꽤 쓸만한 영화를 본 것 같달까. 


책 뒤에 실린 인터뷰어의 말처럼, 이 책은 (문장력과 구성은 전혀 아니지만)

1984나 멋진 신세계보다 미래 예지력은 훨씬 뛰어나다. 

영화 <HER>가 귀이어폰과 벽면 TV를 이 시대에 변형해 좀더 정교하게 끌고 나갔다면,

1950년대 쓰인 이 책은 딱 '50년대'적 상상력에 기반해 허술하게 미래를 묘사한 거고.

뒤에 실린 레이 아저씨 인터뷰도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비호감이지만 ㅎㅎ 


그렇다면 우리 손에 책이 쥐어져 있는 시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미 책에서 스마트폰으로 설날 민족대이동보다 훨씬 거대한 전환이 진행돼버렸지만.


“아주 옛날, 우리 손에 책이 쥐어져 있을 때는 

그것을 올바로 쓰지 못했습니다. 

그저 죽은 사람을 모욕했을 뿐. …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고 있냐고 물으면,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기는 길입니다. 

그리고 거대한 굴착기를 만들어 

역사에 남을 거대한 무덤을 파서 전쟁을 쓸어 넣고 

완전히 덮을 정도로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될 겁니다.” 

(248쪽) 


기억하기 위해, 책을 읽는 방법. 

노동시간 단축과 저녁이 있는 삶,

좋은 책이 살아남는 세상, 

그리고 개개인의 깨우침과 실천. 


“책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까?”


“세 번째 조건이 만족된다면. 

첫 번째는 정보의 질, 

두 번째는 그 정보를 소화할 충분한 시간, 

그리고 세 번째는 두 조건의 상호 작용으로 얻어지는 

우리의 배움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권리요.” 

(1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