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을 산책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혹은 오후 반차를 내고 평일 오후에 아메리카노를 손에 들고 홀로 가기에 좋은 미술관으로
대림미술관과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을 들 수 있다.
(데이트 하는 커플이 대부분이지만)
둘 다 참으로, 좋다.
미술관이 위치한 동네마저도 근사하다. 서촌!
전시회를 안 봐도 그 동네만 산책하다 와도 주말의 도심 산책으로 제격이다.
대림미술관 3층인가에 있는, 미술관 전시관과는 고립되어, 가만히 앉아서 창을 바라보게 놔둔
길게 의자가 놓인 공간마저도 좋다.
몇 년 전 대림미술관을 찍어놓다가 내가 일하는 여성환경연대 후원잔치 장소로 빌리기도 했었다.
그 때는 홍대 앞 '미미네'가 인천의 분식점 중 그저 하나에 불과했던 시절이라
D라운지도, 미술관 앞에 줄 서서 기다리는 관람객도 전혀 없었고
그래서 믿어지지 않는 장소비로 대림미술관을 대관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림없는 ㄷ ㄷ ㄷ)
대림미술관
http://www.daelimmuseum.org/index.do
헨릭 빕스코브 전 Fabricate
2015. 7.9~12.31
관람비 5,000원 (온라인 회원 20% 할인)
어쨌든 대림미술관은 서울에서 가장 데이트 하기 좋고, 가장 트렌디한 미술관이 되었다.
티켓 가격도 부담 없는 5,000원에,
스마트 폰에 앱을 다운받으면 전시회 오디오 가이드가 솔솔 나오고,
넉넉잡아도 1시간 안에 전시를 다 볼 수 있고
입장권을 가지고 있으면 언제든 무료로 전시를 다시 볼 수도 있다.
부대행사도 꽤 멋지고.
나무 조각으로 퍼즐처럼 끼워맞추는 블록 작품
비누방울 소다
비누방울에 비친 것처럼 특수한 카메라를 써서 인체 이미지를 표현
그의 작품 사진들
사막의 극한적 상황을 염두해 둔 가장 최근 작품
360도 가슴으로 점철된 패션쇼 무대와 작가가 디자인 한 옷
민트를 소재로 한 무대와 패션쇼 영상
러시아 인형
실제 무대에서 사람과 인형이 동시에 움직이면서 몸이 움직이는 형상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아, 이 옷걸이가 작품 중 제일 마음에 들었다는 거!
위트가 있다니까. ㅎ
DNA 나선형을 모티프 삼아 만들었다는데
뭐 갖다 붙이면 뭔가 말이 되는 거 아니겠는가.
마치 마이너 취향만 알아보던 연예인이 대중적으로 뜨면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처럼,
못난 마음으로 꼬장을 부리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전시는 그야말로 '스놉스놉'의 향연.
(내 친구가 카톡으로 그 전시 너무 스놉스놉하지는 않고? 라고 물었는데,
그 이외의 한 단어로 이 전시를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그녀의 표현을 표절하고 말았음 ㅋㅋ)
뭐, 그놈의 속물적 성향도 사랑하고, 심지어 홍대 앞 'the snob'이라는 케이크 카페도 좋아하지만,
전시가 대놓고 스놉스놉하고 너무 트렌디트렌디하니까 마음이 좀 식어버렸다.
뭐 대림미술관 전시에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윤석남 전시회' 같은 작품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고
시립과 사립 미술관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고
대림미술관은 바로 그 시립이 커버하지 못하는 (혹은 않는) 취향을 저격해 뜬 것이 분명하지만
나는 도살장 컨베이어 벨트에서 죽은 채 거꾸로 매달려 있는 닭의 모티브를 따서
펠리컨 부리 모양을 패션쇼 런웨이의 360도 배경으로 삼는 그 정도의 '스놉스놉'에는 멀미가 난다.
죽음이 왜 패션쇼 런웨이의 주제가 되지 않을쏘냐 마는,
어떤 죽음을 어떻게 다루는가에는 의미가 끼어들게 된다.
나는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 대해서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
필요한 '창의성'을 미리 설정하거나 '공식'을 세우지도 않는다.
잘 모르는 세계에 스스로를 던져 놓는 것을 던지며,
그 속에서 즉흥적으로 배우고 새롭게 적응해 나가는 것을 좋아한다"
- 헨릭 빕스코브 (Henrik Vibskov)
그러니까, 딱 거기까지.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가 정답.
애초에 의미가 없다는데 어디서 의미를 짜내겠는가.
말 그대로 트렌디한 전시회에 놀러 가서 눈요기를 하고 오면 되겠다.
눈요기 거리는 꽤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일이 너무 너무 많아서 밤에도 낮에도 종일 일하다가
하던 연예도 깨지고 만다는 대림미술관 큐레이터의 '저주'를 생각할 때
도대체 이 '스놉스놉'은 뭐에 쓰는 물건인지,
아무래도 다음 번 대림미술관 전시에는 오지 않을 것만 같다.
올해 10월 한남동에 D뮤지엄이 개관한다니,
그래도 스놉한 마음을 채우고자 그곳은 한번 방문하고 말이지.
하여간 그놈의 스놉은 힘이 세다.
그런데 그 놈의 스놉스놉은 결국 더욱 젠체하기 위해 의미를 찾게 된다는 사실.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것이 아주 트렌디할 수도 있다는 것.
대림미술관은 이를 어떻게 채워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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