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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개처럼 일할 자유"를 내던지고 6시간 노동제로.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3. 1. 4.

8시간 VS 6시간 Kellogg's six hour day
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 1930~1985



이후 출판사에서 일하는 대학 후배에게 갑자기 돈 빌리는 연락처럼 뜬금없이, 문자했다.

'8시간 VS 6시간 (Kellogg's six hour day)'를 읽다가 이렇게 괜찮은 책을 다 냈군, 하는 마음으로 날린 문자였다.

그 친구는 "그거 실은 야근하면서 만든 책이에요 ㅋㅋ"라고

여느 편집자다운 문자를 보내왔다.

한 장을 노동중독에 할애한 강수돌 교수와 홀거 하이데 교수의 책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도

노동중독에 빠진 것처럼 밤낮으로 노동해 만든 책이라고 들었다.

시간은 가는데 틱톡틱톡, 6시가 다가오는데 틱톡틱톡, 오늘의 할일에서 삭제당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일감들이여.


일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노동이 삶을 점령할만큼 과하게 노동해야 먹고 살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은 노동중독자처럼 살아볼 일자리라도 한 번 가져보면 좋겠다고 하고. 

아놀비 토인비는  "우리는 일자리를 나누던지, 아니면 일이 없는 사람들 돌볼 것이다." (책 278쪽)라고 했는데

우리 사회는 철학적으로만 일자리 나누기를 이야기하고

실제로는 일이 없는 사람들을 돌볼는 일까지도 노동자가 셰빠지게 해내야 하는 모냥새로 전격돌입한 듯 하다.


금욕적 형의 사우나 사업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다가 우연히 식품회사 캘러그를 창업한 캘러그 박사는

손자가 일과 의무에 짓눌려 살면서 건강을 해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는 급기야 "일에 쏟는 엄청난 에너지를 줄이고 건강해지는 것에 집중할 때까지" 이 젊은이의 임금을 삭감했다고 전해진다.

손자 임금을 깎을 정도로 '해방적 자본주의'를 추구한 1920년대~1930년대의 켈로그 경영진은 

일을 두 시간 덜해서 줄어드는 소득을 시간당 임금율 12.5 퍼센트 인상해 어느 정도 상쇄하고 (책 36쪽)

초과시간수당을 없애고 대신 초과생산수당을 도입하여 노동효율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6시간 노동제를 장착한다. 

초과생산수당은 얼마나 오래 일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생산했느냐를 기준으로 지급하는 것이다.

그 결과 세계대공황이 일어나기 불과 몇 년 전인 1930년에 6시간 노동제를 처음 실시했고

일년 후인 1931년에는 수백만 달러의 이윤이 났는데, 이는 1928년의 두 배였다. (책 57쪽)

켈로그 박사와 그 경영진은 적어도 노동 이외의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고

신성한 노동을 함으로써 노동과 삶이 하나되어 꿈을 달성한다는 거짓부렁을 말하지도 않았고

어차피 생계수단을 위해 해야 할 노동이라면 싸게싸게 처리하고

지역사회와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써야 한다고 믿었다.

정신신경과 의사와 상담하면서 켈로그 박사는 가장 안타깝고 슬픈 시간을

과도한 노동으로 인해 소외된 자신의 인생으로 보았다.


그 두 시간.


추가적인 두 시간은 바라 마지않는 오아시스와 같은 시간이었고,

투쟁, 갈등, 계급, 성역할, 통제, 필요성의 논리, 사회구조 등에서 벗어난 시간이었으며,

"모든 것을 쓸모 있는 목적으로 바꾸려는 효용우선주의"를 넘어서 "창조적인 활동을 위한

독립된 영역"이었다. (26쪽)


외부의 시간에는 산책하고, 책을 읽고, 텃밭을 가꾸고, 무언가를 배우고,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고,

글을 쓰고, 감상하고, 사랑하고, 생각하고, 즐기고, 좋은 이웃이 되고, 돌보고, 이야기를 하고, 새를 관찰하는 일들을 "그 활동 자체를 위해" 할 수 있었다.

이런 '여가'는 더 많은 노동을 하기 위해 재충전하는 시간이 아니었고,

생각없는 소비나 수동적인 오락도 아니었다. (27쪽)

6시간 노동제를 실시한 보리 출판사의 모습

4시 이후에 일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은 "너, 오늘 야근하니?"이다.

(사진출처: 한국경제매거진)


 켈로그 공장 인근 30만 평방미터의 논밭에 그윽한 주머니 텃밭들,

6시간제를 가장 강하게, 굽히지 않고 고수한 여성노동자들이 자기도 알게모르게 추구했던 대안적인 사회구조와 활동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성별과 계급과 문화를 전복하는, 삶을 바꾸는 시도가 일어난다. 

여성노동자와 근속연수가 짧은 젊은 노동자들은 6시간 단축을 통해 일자리를 나눈다.

반대로 근속연수가 높은 남자 노동자들은 연장 노동과 초과노동수당을 통해 더 많은 임금을 받기를 원한다.

"더 짧은 주당 노동시간을 향한 진보는, 노동운동의 역사 그 자체다."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사안을 통해서 보면,

노동의 역사는 "더 많이"라는 단 하나의 후렴구만을 가진 단조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자유를 찾아나가는 역동적인 서사가 된다. (91쪽)


그러나 대공황을 국가 자본주의로 그럭저럭 풀어나갔다고 소개되는 '뉴딜정책'를 펼친 루스벨트는

경기를 진작시키고 필요하다면 공공 고용을 일으켜서 일자리 총량을 늘리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쪽에 더 관심을 갖었다.

노동시간 단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여가의 증가가 개인의 자유와 진보의 기초라고 본 반면,

정부는 '풀타임'으로 일할 권리를 모든 사람에게 보장하고

일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국가 진보의 기초라고 여겼다.

루스벨트의 일자리 창출이라는 개념은 처음에는 "일을 굳이 억지로 만들어 내는" 낭비라고 비난을 받았지만,

곧 산업화된 국가의 정통적인 정치적 입장으로 자리 잡았다. (68쪽)


그리고 점점 더 노동시간 단축을 비판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풀타임" 잡을 주는 것만이 복지와 진보라고 말해진다.
경영자와 정부는 그 물결을 타고 더 적은 사람을 고용하여 수당과 관리비는 줄이면서 노동효율성을 높여 이윤을 내고

더 많은 임금으로 방향을 튼 노조는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삶의 질과 진보를 숫자로 대신한다. 

주급을 유지한 상태에서 노동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이제 진보가 아니었다. 

주급은 낮아도 노동시간이 늘어서 돈을 많이 벌면, "일돼지"가 되면 그것이 바로 진보였다.

거짓말하지 않는 숫자만이 진보라고 한다 치더라도,

그것은 일자리를 부여잡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진보였다.


그 사람들이 여성들이 8시간제로 가도록 투표했을 때,

나는 이것이 하나의 교대조가 통째로 해고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어요.

근속 연수가 길고 돈에 굶주린 사람들만 8시간제를 원했어요.

젊은 노동자들이야 어떻게 되건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었죠. 274쪽    


버트런트 러셀은 1900년대 초에 이 속도로만 노동생산성이 향상된다면

2000년대에 살고있는 우리는 모두 4시간 정도만 일하고도 썩 괜찮은 생활수준에서 살 거라고 말했다.

노동이 삶을 압도하는 한국에서,
그러나 해고노동자들은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추위 아래 "함께 살자"고 비닐천막 안에서 밤을 새는 이 시간.
우리가 그토록 강조하고 달성해온 노동효율성과 생산성은 도대체 누굴 위한 것인지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