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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 life/etc.

[한국일보 삶과 문화] 노브라 노프라블럼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6. 8. 17.

한국일보 2016년 8월 16일 (화) [삶과 문화] 칼럼 기고


노브라 노프라블럼


 

뜨거운 여름철 보건복지부가 ‘핫’하다. 서울시 청년수당을 틀어막아 복지의 반전을 보여주더니 태평양처럼 넓은 오지랖으로 아름다운 가슴까지 뻗어나갔다. 불과 얼마 전까지 복지부가 운영하는 ‘국가건강정보포털’에는 여성의 유방 사이즈, 유두 사이의 거리, 유륜의 직경 등을 그린 모식도와 “가슴은 남편에게 애정을 나눠주는 곳” “제 2의 성기”라는 설명, 그리고 유방 성형술 안내가 실려있었다. 나는 이크종 작가가 “국가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그려낸 ‘아름다운 꼬추의 모식도’를 보면서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빡침’을 달래려 했다. 그런데 며칠 전 한 사건을 겪고는 조용히 분을 삭이지 않기로 했다.


함께 저녁을 먹다가 말갛고 어린 후배가 갑자기 체했다.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 가까스로 내뱉는 말인즉 “보통 브래지어 풀면 체한 거 내려가는데, 밖이라 풀지를 못하겠어요.” 아니 셔츠 안에서 브래지어 후크만 푸는 데도 이렇게 부담스러워하다니, 내 마음에 체기가 내려앉는 듯했다. 풍문으로 떠돌던, 브래지어 때문에 잘 체한다는 ‘괴담’을 직접 목격하다니 충격적이었다. 나는 가정 선생님이 브래지어 착용을 강제했던 중ㆍ고등학교 시절 이후 근 20년간 ‘노브라’로 살아왔다. 아마 그 망할 놈의 ‘브라자’를 해본 적 없을 이성애자 남자들, 아이들, 동물만이 노브라의 해방감을 모르리라. 


횡격막에 짱짱한 고무줄을 동여맨 듯한 압박감, 브래지어 끈 따라 살갗에 새겨진 빨간 자국의 따가움, 솜옷을 입은 듯 두꺼운 브래지어 패드로 흐르는 땀. 브래지어는 겨드랑이 근처 림프절을 압박해 혈액순환에 좋지 않고 처지는 유방을 ‘볼륨 업’시키지도 못한다. 만약 유방만큼 무거운 물체가 중력을 거슬러 제 자리를 유지한다면 브래지어는 노화방지학회 학술상뿐 아니라 노벨 물리학상도 거머쥘 수 있을 거다. 그러나 이를 다 아는 여자들도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집안에서나, 그리고 더 이상 여성이 아닌 중성적 존재로 치환되는 ‘할매’가 될 때에야 비로소 브래지어를 푼다.


뽕브라니 원더브라니 지들이 좋아서 브래지어를 한 거 아니냐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윔블던에서 우승한 테니스 선수 세레나 윌리엄스의 젖꼭지가 불편하다는 수많은 악성 댓글은 뭔가. 그는 대회 규정에 따라 흰색 상하의를 입었고 여름철에 적합한 얇은 브래지어를 찼을 뿐이다. 인스타그램에 셀카를 올린 아이돌 가수 설리도 노브라 논쟁에 시달렸다. 네티즌들은 그의 사진을 분석해 노브라를 인증했고 검색엔진에 그의 이름을 넣는 순간 노브라가 자동으로 뜬다. 설리가 뭇매를 맞던 날 인스타그램에 새로 올라온 걸그룹 AOA 멤버 설현의 도색적인 광고 사진은 수천 건의 ‘좋아요’를 받았다. 심지어 엄마가 된 기쁨에 모유수유 사진을 올린 정가은에게 야하다거나 ‘관종(관심병종자)’이라고 한다. 새삼스럽지만 여자든 남자든 젖꼭지가 있고 남자들도 엄마 젖 먹고 자란다. 발가벗겨지는 관음적 용도의 여자 가슴은 좋지만 여성 스스로 자신의 몸을 드러내면 역겨워하는 시선에야말로 ‘브라자’를 채워주고 싶다.


모든 사람들이 브래지어를 벗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가슴이 커서 어깨가 아픈 여자, 운동할 때 덜렁거리는 가슴을 고정시키고 싶은 사람, 섹시한 속옷을 입고 싶은 여장 남자에게 브래지어는 필요하다. 하지만 누군가의 눈으로부터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느끼기에 불필요하고 답답할 때 브래지어를 벗을 권리 또한 존재한다. 다행히도 유독 더운 올해 여름 홑겹브라 ‘브라렛’이나 와이어 없는 노와이어 브라, 넉넉한 민소매 티 모양의 ‘건강브라’가 유행이다. 가슴이 작든 크든 이 시원하고 편안한 브래지어를 맘놓고 착용해보시라. 스타일리스트 한혜연 언니가 말씀하사 “젖 없는 여자들 옷빨이 얼마나 시크한데.” 물론 노브라 역시 ‘노프라블럼’이다.


글| 고금숙 여성환경연대 환경건강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