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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 House

비전력 아날로그의 낭만_페트병 스피커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5. 10. 29.

비전력 물건들은 예상 외로 낭만적이다

에너지 중에서도 가장 절박하게

원전 반대 시위에서 ‘팔뚝질’하는 심정으로 

전기를 아끼고 싶었는데

겪어보니 나처럼 감성 메마른 사람에게도 어필하는 

아날로그의 매력이 분명, 있다

 

절수, 단열재, 창호 공사는 ‘이 정도 불편쯤이야’, ‘이 정도 돈은 더 써야지’라는 각오를 다지고 

에너지 절감의 대차대조표를 그리는, 지극히 실용적인 과정이었다

낭만 좋아하고 자빠졌네

낭만이나 잉여, 장식 같은 것은 도무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집안 구석구석 에너지 절약 요새화, 새 자재 구입시 삼고초려, 가능한 선택지들의 시뮬레이션만이 

머리 속에서 버퍼링 되고 다운되다가 다시 버퍼링 되고는 했다

싱크대 헹굼 물을 받아내고, 왕겨 숯 단열재를 사다 쟁이고, 당최 취향이 아닌 방문을 재사용하는 마당에 뭔 놈의 낭만

그런데 전기 공사에 들어서면서 조명을 시작으로 에너지를 뛰어넘는 낭만이 튀어나왔다

말하자면, 여행을 떠난 사람처럼 일상의 한 순간이 반짝반짝 빛나는 경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순간은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좋아하는 만화 책을 스탠드 아래 펼쳐놓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커피를 내릴 때다

물을 끓이는 동안 핸드 밀에 원두 콩을 넣고 연필 깎듯이 손잡이를 돌린다

전기 대신 팔을 돌려 원두를 가루로 만든다

원두 콩 가는 소리와 물 끊는 소리가 함께 섞일 즈음에는 커피 향이 조그만 부엌 전체를 감싼다

그러면 융천으로 만들어 수백 번 빨아 쓸 수 있는 다회용 필터에 커피가루를 붓고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린다

전기 대신 손으로 만들어내는 낭만적 에너지의 향연

핸드 밀, 융천 그리고 핸드드립 커피

커피를 내릴 때면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주인공이 

맛있는 커피를 내리면서 속삭이던 주문 ‘코피 루왁’을 흉내 낸다

 

이렇게 부엌에 있을 때는 스마트폰을 비전력 스피커에 연락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다

나무 속을 비워내거나 페트병을 이용한 비전력 스피커는 텅 빈 공간을 통해 음을 증폭시키며 

스마트폰의 디지털 음감을 아날로그 감성으로 순화한다

성량 좋은 전기 스피커처럼 소리가 증폭되지는 않지만 

휴대용 전기 스피커보다는 소리도 크고 음감도 훨씬 부드럽다

이렇게 비전력 물건들이 만드는 일상의 의례를 통해 나만의 ‘킨포크 스타일’ 커피가 탄생한다

중년 나이에 손발 오그라드는 소녀 감성이라고 후후 웃지만, 아무래도 좋다

노란 불빛 아래 즐기는 낭만서린 비전력 시간들에 취해 커피 맛도 모른 채 커피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망원동 에코하우스』 192~1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