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선선한 아침, 7월 이후 처음으로 온수 샤워를 했다.
아침 저녁으로 찬 기운을 머금은 바람을 맞으며 계절 가는 것이 눈에 보이듯 손에 잡히듯 흘러간다.
더워서 전기 잡아먹는 계절이 가는가 싶더니, 일말의 짬도 주지 않고 추워서 가스 잡아먹는 시절이 코 앞이다.
여름도, 겨울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잔혹하다.
돈 잡아먹는 계절이라는 푸념이 사치일 만큼, 누군가에게는 사는 것이 시린 시간들이다.
황인숙 시인은 <<인숙만필>>에서 '머리가 띵해지도록 추우 날' 길거리에 누워있는 노숙자를 보고 이렇게 썼다.
"불운한
사람들의 유일한 도피처인 잠조차 최소한도 지켜주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독한가?
우리는 악독한 추위처럼 독하다. 그런 거 같다.
죄 없이 벌받는 사람이 많은 겨울이다. 죄 많은 겨울이다."
또 다른 의미로 죄 많은 여름이 넘어갔다. 혹독한 날씨는 그 만큼의 댓가를 필요로 한다.
이 혹독함을 이기는 방법은 '에너지 노예'를 부리는 것인데,
올 여름에도 더 많은 '에너지 노예'를 확보하기 위해 신규 원전과 송전탑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앤드류 니키포룩는 <<에너지 노예, 그 반란의 시작>>에서 영국의 한 가정집에서 몰래 진행한 실험을 말해준다.
침실 4개가 딸린 집에 사는 4인 가족이 하루 동안 사용하는 에너지를 옆집에서 ‘인간 발전소’가 생산하는 실험에서
오븐의
열을 내기 위해 24명이
자전거 페달을 밟았고,
토스트
2장을
굽는 데는 11명이
필요했다.
자전거
페달을 돌린 사람들은 대부분 일을 마치자마자 그
자리에서 뻗었고 몇 명은 며칠 동안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인간 노예보다 에너지 노예가 훨씬 '인간적'으로 들리지만 에너지 노예의 뒤에는 기실 삶의 기반을 빼앗긴 사람들의 눈물이 있다.
전기 소비량의 55%를 차지하는 산업용 전기와 원가에도 못 미치는 전기세는 냅두고
에먼 서민들만 잡다가 공치사로다가 "국민들이 애껴줘서 이 여름을 무사히 날 수 있었다"는 언변을 들을 때면
전기를 아끼는 것도 '새마을 운동'에 동원되는 기분이라 영 찜찜했다.
그러니 올 여름 내가 그나마 에너지 노예를 덜 부리려고 집을 고치고 이리저리 몸으로 움직인 것은
실질적으로 뭔 소용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그저 '밀양 할매'들에게 미안해서라고 해야겠다.
전기 잡아먹는 서울에 사는 사람으로서 내 전기 고지서가 밀양과의 연대를 숫자로 보여주는 증표가 되기를 바랐다.
5월 전기료인데 전달 2,770원 미납분이 합산되어 5,970원이 나왔다.
즉, 5월 전기세는 3,200원, 사용량은 41kWh이다.
(이사 들어온 날이 5월 2일이라 약 일주일 밖에 안 살었다.)
이 요금에는 TV 수신료 2,500원이 포함되어 있다.
전기를 가장 많이 쓴다는 7월, 8월 전기세 고지서이다.
5월 사용량이 41kWh인 반면 7월에는 67kWh, 8월에는 70kWh으로 올 여름 전기료가 약 7,600원 나왔다.
(집 크기는 53평방미터 (=약 15평), 2인 거주)
공공요금 중 전기요금 영수증이 가장 친절한데 1년 사용량 추이와 전년 동월, 지역 평균 사용량을 다른 집과 비교할 수 있다.
또한 고지서에 자동으로 TV 수신료가 붙어 나오는데
텔레비전이 없는 집은 한전에 수신료 삭감 신청을 하고, 그 전에 냈던 수신료를 환급받을 수 있다.
집에 들이지 않은 가전제품 목록
- 전기 청소기 (빗자루와 대자루 이용)
- 전기 비데 (전기를 쓰지 않는 기계식 비데 설치) http://ecolounge.tistory.com/269
- 전기 제습기 (올해엔 장마가 질퍽하지 않아 잘 넘어갔으나 나중에 후지무라 선생의 비전력 제습기를 만들어봐야지.)
- 김치 냉장고 (궈궈, 밥은 해 먹어도 김치까지 담궈 먹진 않으니 패스, 맥주와 야채 맛이 그렇게 좋다고 하더만.)
- 전자레인지 (해동은 가스레인지와 찜솥으로 해결, 인스턴트 식품은 잘 안 먹으니 전자레인지 쓸 일이 별로 없고.)
- 에어컨 (앞베란다, 뒷 베란다 맞바람 통하는 구조에 선풍기 2대, 그리고 거실 천장팬 이용)
- 다리미 (올 여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음)
- 냉온 정수기 (전기를 쓰지 않는 기계식 정수기 사용, 찬물은 따로 물통에 넣어 냉장고 보관)
http://ecolounge.tistory.com/274
- 드라이어기 (여름엔 냅두면 알아서 마르고 겨울엔 저녁 먹고 감으면 자기 전에 마른다.)
집에 상주하는 가전제품 목록
- 237리터 냉장고
- 선풍기 2대 (탁자용 1대, 일반 선풍기 1대), 거실 천장 팬
- 노트북 2대와 스피커 1대
- 3.3kg 세탁기
- LED 42인치 텔레비전과 셋톱박스
- 인터넷 전용회선
- 휴대폰 2대와 인터넷 집전화
- 집 안 LED 조명등과 부분 조명 장치들 5개
- 전기 주전자
- 전기 밥솥 (그 때 그 때 먹는 양만큼씩 해 먹어서 보온은 통 안 씀)
그러나 꼭 필요하지 않아도 인생의 달달한 위로가 되는 가전제품도 구비하고 있다.
- 보기만 해도 행복한 네스카페 캡슐 커피기
- 태국에서 사온 공 조명 (조명 대신 인테리어 소품으로 사용)
- 미니 오븐기
- 미싱
왜 에너지소비효율등급 1등급은 대형 사이즈나 최신 기능이 딸린 가전제품에만 적용될까?
사이즈, 용량이 적거나 기능이 단순한 가전제품에서 1등급은 상당히 낯설다.
매장에서 에너지소비효율등급이 제일 높은 것으로 골라 구입하는데도, 냉장고는 2등급, 선풍기는 3등급이다.
차곡차곡 정리해보니 제법 많은 전기제품을 가지고 산다.
아주 좀내나게 아끼지 않아도, 마음의 허기를 채워줄 향락의 가전제품을 가지고 살아도, 전기세는 만원이 안 나올 만큼 싸다.
자기 전에 이빨 닦는 것처럼 꼭꼭, 인터넷 전용선과 셋톱 박스 등 모든 플러그를 뽑고
에너지 노예를 부리는 대신 내 몸을 움직여 살림을 돌보고
디지털보다 아날로그를 선택한다.
잘 때, 출근할 때에는 인터넷 전용선을 꺼 두셔도 좋습니다. ㅎㅎ
지난간 여름의 전기사용 대차대조표를 곱씹어보고 9번의 가을 바람을 맞이하는 밀양의 들판에 가 볼까나.
밀양 할매들은 '포기하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기죽지도 않은 채'
12기의 핵발전소와 이어진 송전탑의 싹을 살라먹고 있다.
밀양 송전탑 반대 대책위에 따르면 한전은 추석 직후인 23일부터 공사를 밀어부칠 예정이다.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소중한 일상적인 변화야말로, 대단한 혁명이 불가능한 시간,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시간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혁명의 불씨들이다.
때로 혁명보다 무서운 것은 '혁명적인 연대'다.
짓밟히고 상처입고 무시당한 자들이, 포기하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기죽지도 않고 연대하는 것이다."
-정여울, '혁명이 불가능한 시간을 견디는 힘' 에서 (한겨레 신문)
밀양의 친구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퍼온 웹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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