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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 day31

[영화] 콜미바이유어네임, 그리고 120 BPM 백수로 놀던 시절은 인디언 써머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새 출근을 코 앞에 두고 계절의 끝물에서 마주한 제철과일을 먹는 심정으로, 평일 대낮에 영화를 봤다. 한 주에 아름다운 퀴어영화 두 편을 보다니, 이 영화들은 존재만으로도 내 백수인생의 끝자락을 축복해준 거다. 현재 내 플레이리스트는 'mystery of love'와 'visions of Gideon' 그리고 'smalltown Boy'로 점철돼있다. 각각 과 의 주제곡들이다. 은 여러 모로 의 게이 버전이랄까. 내게 두 영화는 데칼코마니 같다. 둘 다 황홀하게 아름답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스크린을 관음하는 완벽한 미학이랄까. 에는1950년대의 레트로 미국, 필름 카메라, 모피, 담배 연기, 담배를 말아쥐는 손길, 눈빛이 있다. 에는 이태리 여.. 2018. 3. 26.
같은 질문, 다른 답_인생 역술 타로, 사주, 별자리, 점. 사람이 미래를 점치는 일에 자신을 내맡길 때는 다음과 같을 때다. 지금까지 내 삶의 경험과 데이터로는 도저히 답을 내릴 수 없어서, 나도 나를 못 믿겠는데 내가 내린 배팅의 결과를 삶으로 겪어내야 할 것이 두려워서,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있을 때 당신에게 불현듯 일어나는 어떤 것이다'라는 존 레논의 말처럼 갑자기 닥친 불행의 원인과 '그나마의' 대책을 찾고 싶을 때다. 그리하여 미래를 내다보고 싶어서라기보다, 인생 카운셀링을 받고 싶어서 생판 모를 타자에게 자신을 고해받친다. 근 한 달간 갑자기 급전이 필요해 빌려준 빚 받으러 다니는 사람처럼, 여기저기 인생 카운셀링을 받으러 다녔다. 평소 새겨 듣는 친구들의 조언을 싸그리 무시하며, '답은 네 안에 있어, 그 돈으로.. 2017. 9. 23.
엄마의 당일특급 스티로폼 박스 퇴근하고 돌아오니 흰색 스티로폼 박스가 현관문 앞에 놓여있다. '당일특급'이라는 중요한 표식을 몸에 붙이고서. 나는 그 스티로폼을 노려보다가 결국 집으로 들였다. 아침에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일찍 퇴근해 바리바리 싸보내는 반찬들 어여어여 냉장고에 넣으라고 말이다. 이미 이 주 전, 엄마 집보다 훨씬 작은 우리 집 냉장고는 차 있고, 알아서 반찬 잘 해 먹고 있으며, 저번에 보내주신 김치가 여태 남아 더이상 쟁여놓을 곳이 없다는 통화를 했었다. 말 안 통하는 '진상' 손님에게 회사 원칙을 반복해서 말하는 콜센터 직원처럼 몇 번의 통화에서 나는 그 말을 계속 했었다. 결과는 우체국 당일택배를 붙인 다음 사후 통보. '그럼 맛있게 먹으면 될 거 아냐', 라는 내 룸메이트는 이 절망감의 요지 따위는 모를 것이.. 2017. 6. 20.
동네 자전거 가게야말로 공유경제! 공유경제에 대해 '노동자의 시간을 세포 단위로 쪼개 화폐화하는 신자유주의의 전략'이라는 평이 있다. 우버나 에어비앤비에서 터져나온 문제를 생각해볼 때 이런 공유경제의 디스토피아적 관점이 과장이라고 만은 할 수 없을 듯. ㄷ ㄷ ㄷ 빌려 읽은 책들을 자전거에 가득 실고 '나의 훼이버릿' 마포서강도서관에 도착했는데, 글씨 앞바퀴 바람이 빠져서 덜컹덜컹했드랬다. 도서관 앞에 친절하게 서 있는 공공 자전거 공기투입 주입기의 밸브는 일반 자전거와맞지 않는 주둥이! 아아, 쓸래야 쓸 수가 없구낭. (도대체 왜 공공 공기투입기의 밸브는 그 모양입니꽈아!! 자전거 가게마다 구비되어 있는 일반 자전거용 밸브를 못 다는 이유라도 있습니꽈!!) 애니웨이 바람 빠진 자전거에 올라타자니 이것은 자전거 개착취. 그러하여 도서관 .. 2017. 6. 18.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같은 마음으로 Alone again. 오늘 내 마음은 그러니까, 재개발 날짜를 코 앞에 두고 이주 개시일은 이미 한참 지나위 아래 옆집 모두 이사 가버린 후 유리창이 쨍쨍 깨져나간 건물에갈 곳이 없어서 버티고 남아있는 단 하나의 집만 같다. BGM은 쓸쓸하고도 아스라한 느낌이 드는 이소라 목소리의 . 무담시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만 같아서 집에 오는 길,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변함없는 전라도 사투리를 들으며 나는 위로를 받았고오늘의 비극적 기운에 압도되어 칠십이 넘은 엄마가 언젠가 돌아가시면 이럴 때 전화를 걸 엄마가 없을 텐데, 라며 애간장이 탔다. (평소에는 엄마랑 전화하면 완전 짜증 냄 -_-;;) 나는 덩그러니, 혼자, 자기 연민과 과도한 감정에 경도된 사람마냥 나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과 관계들이 결국 모두 날 두고 떠날 .. 2015. 9. 14.
[노래] 센티멘탈 시너리, 그대가 있고, 또 내가 있길. '센티멘탈 시너리'의 음악을 들었다. 창 밖으로 떨어지는 비를 보며 따끈따끈한 커피를 한 잔 내리면서. 잔잔한 바람이 불고 갈대가 흔들리는 나지막한 언덕에서 ‘쓸쓸해도, 좋은 걸’ 쯤의 센티멘탈이 솟아나는 풍경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음악을 들으며 아일랜드 여행을 하다가는 서정적인 책 한 권은 낼름 써 버릴 것 싶었다. 어떤 평론가의 말처럼 이번 앨범은 그루브를 덜어낸 자리에 ‘에피톤 프로젝트’의 완성도를 갖춘 감성이 오롯이 들어차 있었다. 타이틀 곡 ‘서약’을 2번 연이어 듣다가 가만 동작을 멈췄다.커피를 쪼르륵 내리다 쪼르륵 소리를 그만 두고 가사를 들었다. "내 길고 긴 하루의 끝에 그대가 있고, 또 내가 있길." ‘그대가 있고, 또 그대가 있길’ 내 귀는 그렇게 들었는데, 가사는 ‘그대.. 2015. 4. 20.
'한갓 필부'의 생각, 우리보다 오래 살아라 아이를 키우는 입장도 아니고,청소년 인권단체에서 문제 제기했듯 '아이들에게 핵없는 사회'라는 구호가어린이와 청소년을 주체적인 존재보다 지켜주고 보호해야 할 수동적 존재로 자리매김 시킨다는 비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왔다.그래서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그저 참담하고 이런 세상이 어마무시해서 봄날이 봄날 같지 않았다. 30-40대 여성들의 정신적 지주라는 '마스다 미리'의 만화 를 읽다가 멈춰서게 되었다.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건네는 '많이 컸구나'라는 어른들의 말이 '우리보다 오래 살아라'라는 뜻이었다는 부분을 읽다가가슴이 콱 맥혀서였다. 먹는다는 것은 큰다는 것이었습니다.'많이 컸구나'가 칭찬이었던 시절그 '많이 컸구나'는우리들보다 오래 살아라,.. 2014. 5. 1.
자발적 멸종운동에 비자발적으로 함께한 우리 동네 고양이들 자발적 인류 멸종운동(VHEMT·Voluntary Human Extinction Movement)이라고 들어봤는가.나는 이라는 책에서 '옴진리교'나 '호랑말코 교'처럼 사이비적이고 묵시론적 이름의 이 운동을 처음 접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미국의 레스 나이트가 창립한 자발적 인류 멸종 단체는 지구가 인류가 없을 때 더 나아질 것으로 생각한다. 이 때문에 인류는 출산을 하지 말야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이 물리력을 동원하여 사람들이 강제로 출산을 하지 못하게 한다거나, 자살 혹은 살인을 부추기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지극히 평화적인데, 오래 살되 지구의 평화를 위해 흔적없이 죽어 사라지자고 한다. "정의상 우리는 외계상의 침략자입니다. 아프리카 말고는 어디나 그렇지요. 호모사피엔스가 가는 곳 어디.. 2014. 3. 24.
생일날 아침, 찬란한 유언장 쓰기 어느 날 갑자기 죽을 거 같지 않던 나른한 하루, 딱 이 정도면 더도 덜도 바랄 게 없다고 생각한 겨울 휴가, 그리고 따뜻한 방콕의 길거리였다. 어디선가 차가 나타나 길을 건너던 나를 박았고 말도 밥도 낯선 태국의 병원에서 수술을 2번 받고 휠체어를 타고 귀국했다. 여행할 때 거리에서 먹던 태국 음식은 그렇게나 맛만 좋더만, 병원 밥 맛없다는 만국 공통의 진실에 따라 입맛도 없고 한국말로 이야기 나눌 사람도 없는 병상에서 나는 유언장 생각을 골똘하게 했드랬다. 사진: 모모 호스피스 병동의 고여있는 시간 속에서 인생을 차분히 정리할 거라는 기대도 막역한 거였다. 영양분과 미네랄과 진통제를 엄마의 탯줄처럼 연결된 링겔을 통해 피 속으로 공급받는 건강 상태로는, 태아가 엄마 뱃 속에서 어떤 원초적 의지 외에 .. 2013. 10.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