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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 life

쫄쫄이 바지에 대항하는 99%를 위한 시크한 자전거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3. 6. 25.

대학원 다닐 때 교환학생으로 서울에 와 인류학 수업을 듣던 프랑스 애가 나에게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여기서는 산에 갈 때 유니폼을 입어야만 하냐?"

응? 뭔 소리다냐, 했다.

이 아이는 한국에 너무 적응을 잘해 마초 비스무리해진, 얼굴만 외쿡인인 그런 프랑스 애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인류학 수업 듣겠다고 앉아있던 애인데 그 마이너리티가 오죽하겠냐마는,

이렇게 여념없이 '깨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이것이 정녕 인류학적 시선으로, 외부에서 내부를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것인가 하는 깨우침을 얻게 하였다.

학교 주변에 주말마다 등산객들이 드나들던 산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가 마을버스를 타고 학교에 오고가면서 등산객들을 면밀히 관찰한 바였다. 

태국에서는 대학생도 똑같이 교복을 입듯이,

캐나다에서 자전거를 탈 때는 무조건 헬맷을 써야 하듯이,  

한국에서 산을 오르려면 반드시 '등산복'을 입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니가 학교 주변만 관찰해서 그런갑다. 시내 돌아댕기면서 40-50대 아쟈씨들 중 양복 입은 사람을 빼고 좀 봐라라.

운동권이든, 국회의원이든, 강남 아저씨든,

산에 안 가도 죽어라 등산복을 평상복처럼 입는다.

특히 왼쪽 가슴팍과 양 소매 팔목 부분에 빡, 하고 브랜드 로고가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는 놈으로다가"

(우리 단체 전 사무처장님 남편이 국회의원이었는데, 같이 카페를 가도 등산복을 입고 나타난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게 다 뭔 소리냐면

자전거로 망원동에서 영등포동까지 한강길과 양화대교를 건너 출퇴근 하면서

나도 인류학적인 질문이 나왔다는 소리다.

"한국에서는 쫄쫄이 바지와 헬맷과 비싼 자전거가 아니면 한강 라이딩을 못 하도록 정해져 있는가."

여름용 하늘하늘 원피스에 샌들을 신거나 배기 바지에 끈나시를 입고 중고 3만원 짜리 자전거를 타는 자출족으로서

한강의 시원한 바람 속에서 웬지 모를 소외감을 느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아아, 그런 내 눈에 비친 코펜하겐 사이클 시크는

마치 로마 황제의 눈을 피해 지하굴을 파 놓고 몰래몰래 믿음을 다져갔던 밀사단의 은신처처럼 느껴졌다.

김경의 '난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에는 코펜하겐 사이클 시크 사이트에서 인용한 말이 나와 있다.

 

드레스를 입은 채 자전거 페달을 밟는 건 노출의 위험이 있어서 더 근사하지 않나요?

내 속옷이 보일지 말지는 바람이 정할 테니까.

 


세계 최고의 자전거 도시로 알려진 코펜하겐에서 일상복에 생활에서 즐기는 자전거 위의 시크한 도시남녀.

http://www.copenhagencyclechic.com/

지들끼리 노래도 만들어서 뮤비도 찍었나보다.

위의 동영상을 보면 시티 오브 사이클리스트 라는 말이 무슨 주술처럼 계속 반복된다.

코펜하겐 공공 자전거는 '테블릿 PC'를 장착하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는데

자전거 길을 알려주는 네이게이터에, 주변 관광지와 식당 정보 등을 알려주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미카엘 콜빌레 안데르센은 '사이클 시크'라는 말을 만들고

자신의 블로그에 코펜하겐의 자전거와 삶과 사람을 찍어 올렸다.

사진에는 잘 정비된 자전거 전용 도로를 달리는 자전거와

신호등 앞, 큰 차들 옆에 나란히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각각의 자전거 족들이 자연스럽게 나와 있다.

그들의 모토는 '99퍼센트를 위한 도심 속 자전거 Urban cycling for the 99%'이다.

 

 

              사진: 코펜하겐 사이클 시크

 

 

어쨌든 요는 이렇다.

내 눈에 미학적으로 스판덱스 쫄쫄이 유니폼은 알흠답지 않다.

하지만 뒤에서 빨랑 가라고 경적을 울리거나 인도에서 위협적으로 달리지만 않는다면 괜찮다.

교통사고로 3개월간 목발을 했고 그 트라우마로 3년 간 자전거를 못 타다가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는 자체만으로도 시크고 나발이고

나체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있어도 쌍수들어 환영할 판이다.

자전거 타면서 느끼는 한강의 바람은, 정말 행복하다.

백영옥이 '마닐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에서 말한 대목이 알알이 와 닿는다.


가장 좋은 것들은 얼마나 싼가.

, 바람, 새소리, 융단처럼 푹신한 잔디와 신선한 공기는 모두 공짜 아닌가.

이럴 때 신은 얼마나 자애롭고 공평한지 당장 교회나 절에 들어가 묵상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벤츠는 못 사도 휘파람 불며 자전거는 살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말이다.

 

그래도 제발 4대강 국토종주길이다 뭐다 해서

가슴 시리게 아름답고 고라니와 철새의 삶터인 강변을 자전거길 만든다며 시멘트로 덮어버리진 말자.

SUV 차량에 자전거 실고 가서 레저 좀 즐기자고 다른 생명 눈에 피눈물나게 하는거야말로

시크하지 못한 작태다. (그거 만든 사람들이 그렇다는 거다.)

쫄쫄이 바지도 좋으니 제발 도시인 이 곳에서, 지금 이 자리에서 자전거를 타자.

서울의 사대문 안에는 자가용이 드물도록 도심 곳곳에 통행세도 세게 물리고 자전거 전용도로도 뻥뻥 뚫어놓고

보행자와 자전거가 룰루룰루 다닐 수 있는 서울이 되기를.

그러면 '시크'한 서울의 언니 오빠들이 안전하게 자전거로 나댕기며 '국격'을 높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