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점에 나온 신간 목록만 보면 ‘단순한 삶’과 ‘페미니즘’이 세상을 휩쓰는 듯싶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777’공약이 먹혔던 시절이 갔고, 한 물 간 언니들의 패악질처럼 취급됐던 페미니즘이 ‘나라 바꾸는 계집질’로 핫하게 돌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의 팔 할은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갖고 타자를 앞서려는 욕망들로 채워져 있다.
‘단순한 삶’의 유행과 동시에 소소한 인생의 재미를 위해 재산을 탕진한다는 ‘탕진잼’도 대세다. 언젠가 돈 모아 집 사고 차 사고 알토란 같은 중산층이 될 리도 없는데, 더러운 꼴을 견디는 인생을 위로할 한 줌의 여유라도 즐겨 보자꾸나. ‘탕진러’들은 다이소와 드럭스토어, 인형뽑기방에 들러 매니큐어, 립스틱, 캐릭터 문구, 장난감, 인형 등을 ‘득템’한다. 유일하게 자신의 ‘선택과 취향’을 발휘할 수 있는 물건, 설령 선택이 실패한대도 인생이 자빠지지 않는 안정적인 순간들.
“한참 여유가 없을 때, 어쩌다 몇 천원 정도의 가욋돈이 생기면 나는 늘 2천 원짜리 매니큐어를 샀다. 매니큐어는 활용도나 실용성을 따지지 않고 오롯이 내 취향만을 기준 삼아 고를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 늘 이제껏 안 사본 색, 그날 유독 눈에 끌리는 색을 사곤 했는데, 그건 당시 무채색에 가까웠던 일상에서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어떤 색깔이었다. 내가 그때를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런 작은 색깔들 때문이라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선택과 취향이란 그런 거다.”
슬로우뉴스 2017년 2월 유정아 <소비에 실패할 여유>
‘그때’를 버티게 해 준 가난한 사치를 탓할 수 없음을, 탓해야 할 것은 구조적 가난과 실업, ‘생활임금’을 밑도는 임금과 부적절한 일자리 임을 어찌 모르겠느냐 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스틱과 유해물질에 반대하는 환경 활동가로서, ‘단순한 삶’ 부흥 대집회라도 열고 싶은 독실한 미니멀리스트로서, ‘탕진잼’이 거스러미처럼 꺼슬꺼슬 마음을 긁는다. 한 개인의 선택과 취향이 곧 쓰레기로 변할 잘디 잔 소비로만 귀결되어야 하는가. 그렇게 되버린 우리의 인생이란 결국 ‘지는’ 일로 점철될 수 밖에 없다. 디폴트 값이 가질 수 없는 구조에서 부스러기라도 즐기려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못 가진 자의 한밑천은 다른 욕망을 갈고 닦는 것, 애초에 ‘지지 않을’ 다른 선택과 취향을 벼리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물건을 통해 즐거움을 충족하는 ‘탕진잼’을 사랑한다. 하지만 다른 방식의 ‘탕진잼’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부산물을 수명이 다할 때까지 대접하려는 마음, 실낱 같이 얇을지언정 관계가 매개된 물건들, 그리고 남의 선택과 취향을 나의 선택과 취향으로 편집해 수용할 더 큰 여지가 깔려있다.
카페에서 일어나는 물물교환을 소재로 삼은 영화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는 물건을 통해 ‘단지 아직 서로를 못 찾았을 뿐’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의 주인공은 “물건을 교환한다는 건 많은 이야기를 듣는 거야”라고 말한다.
“이 도시에는 도자기가 많은 사람도 있고 적은 사람도 있죠. 소파가 많은 사람도 있고 적은 사람도 있죠. 단지 아직 서로를 못 찾을 뿐이에요. 이게 바로 도시예요.”
타이베이가 아닌 서울에서 나의 ‘탕진잼’을 채워주는 세 곳이 있다.
첫째, 일터인 환경단체 사무실. 활동가들은 자신과 주변에서 안 쓰는 물건을 이고지고 와 습관적으로 물건을 나눠 갖는다. 수시로 물건 교환이 일어나는 것을 아는 내 친구들은 ‘너네 사무실에서 나눠가져’라며 정리한 물건을 택배로 보내기도 한다. 아마 일을 그만두면 이게 제일 아쉬울 듯하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물건 정리를 했다 하면 사무실로 들고 간다.
디즈 이즈 나의 출근 가방
둘째, 사무실 근처에 있는 햇살나눔 보금자리 재활용 가게, 영등포에 있는 노숙자 쉼터와 노숙자 일자리 지원을 위해 만들어졌다. 좋은 물건이 많아 바로 옆의 생협에서 장 볼 때마다 참새방앗간처럼 들른다.
노숙인 자립을 위한 재활용 나눔가게 햇살나무
옆집 가게 '서로살림 농도생협'
마지막으로 망원동에 매장이 생긴 마켓인유(MIU)! 재활용 가게를 세컨핸즈 샵이라고 하면 느낌이 확 다른데(영어 사대주의 ㅜ.ㅠ), 매장을 쓱 둘러보기만 해도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재활용 가게에서 탕진잼이라니, 장난하니?’라는 마음도 돌려놓을 만큼 세련되고 다양하고 젊은 감각이 가게를 그득 채웠다. H&M에서 흘러나올 법한 일렉트로닉 라운지 음악도 소화할 분위기다. 서울대점, 불광점이 있고 온라인 샵을 운영하며 ‘알라딘 중고서점’처럼 위탁판매도 가능하다.
내가 중고물건 세컨핸즈 물건을 사랑하는 이유 중 으뜸은
다양한 취향과 감각을 벼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공짜로 주고받거나 3,000~10.000원의
부담 없는 가격이므로 도시빈민의 월급으로도 마음껏 실패할 용기가 용솟음 친다. 제값 주고는 절대 못
샀을 배꼽 크롭니트, 히피 풍 원피스, 트로피칼 패턴의 헤어밴드, 연한 베이지색 가죽의 손가방을 각각 삼천 원에 구입한다. 실패하면? 세컨핸즈 샵을 공유옷장처럼 여겨 다른 옷으로 바꿔 오거나(다시 쓰는
삼천 원은 이용료라고 생각하지 뭐) 사무실에서 필요한 사람에게 준다.
의외로 개인의 취향은 한정적이다. 제돈 주고 산 새 물건들, 특히 옷과 액세서리를 모아놓으니 살 때는 모두 달랐던 거 같은데 참으로 비슷하더라. 세컨핸즈 샵을 이용하면서 ‘그 밥에 그 나물’인 단조로운 패션 스타일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 어느 날은 단정한 학생 스타일로, 어느 날은 커리어 우먼 룩으로, 어느 날은 인도 고아의 히피 스타일로, 과연 입긴 할까 저어했던 옷들 중 가끔 대박을 터뜨렸을 때의 즐거움이란. ㅋㅋ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한 셈인데, 그야말로 소비의 최고 향락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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