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싸게 구는 녀자'로 통했다.
단체 카톡 창에서 만나는 날을 정할 때, 평일 근무시간만 빼면
이 날도 좋고 저날도 좋고 주말도 다 되고, 웬만해서는 오케이인, 널널한 시간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다들 바뻐 죽겠다는데,
나는 평소 심심한 시간들이 퐁퐁 비누방울처럼 퐁퐁퐁 주변을 떠다녔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책과 만화책만 끼고서 '홈뒹굴링' 삼매경에 빠진 채 한갓져서 행복한 심심한 시간들 말이다. (그렇다, 자랑질이다! 심플라이프의 쵝오 장점 아니겠는가.)
그런데 한 2주 정도 일로 꼬박 들어찬 삶을 살았다.
주말마다 하루 종일 회의에, 마르쉐@명동에 나다녔고
평일 저녁에도 다른 단체 후원행사에, 내가 일하는 단체의 신입회원의 날 등등
집에 돌아오면 밤 11시가 되는 '디즈 이즈 커리어 우먼'의 살을 살아냈던 것이다.
아아, 정녕 이런 거였군.
그 사이 2개월 간 유럽여행을 간다는 일본인이 한국에서 하룻밤 스탑오버를 하는데
급히 묵을 곳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흠, 바쁘지만 이런 언니들이 바로 내 '식'이지. (게이업계 용어 빌려옴 ㅋㅋ)
여행지의 도미토리에서 꼭 한 명 쯤 만날 수 있는
홀로 장기간 여행 다니는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까지의 언니들.
그런 언니들이랑 하루 이틀 같이 여행 다니거나 식사라도 한 번 같이 해서 실패한 적이 없었다.
타지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 여행을 하는데 있어서 말이다.
여행 온 그 순간만 잠시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들은 참 좋은 사람들이었다.
가장 빛나고, 가장 고민도 많고, 가장 내밀한 이야기도 쉽게 꺼내서,
친근감이 화수분처럼 솟아오르는 비슷한 종족의 녀자들.
그래서 일로 점철된 일정임에도
20대 후반에 2달간 유럽 여행을 홀로 떠난다는 일본인에게 방을 내주었다.
우리는 내가 퇴근하는 밤 10시 30분에 지하철에서 만나 한밤중에 집으로 함께 돌아왔다.
역시나, 그 언니의 첫 여행지는 바이클 시크의 도시 덴마크 '코펜하겐'이었다.
내년에 가려고 찜해둔 바로 그 도시란 말이지.
이번 주는 바쁘니 그저 잠자리만 제공할 거라고 했는데,
어찌나 쾌활하신지 새벽 1시 반까지 서로 재잘재잘 이야기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내게 여름 휴가 얻어서 코펜하겐에 같이 가자고 세 번이나 조르는 것을 돈 없어서 못 간다고 사양할 만큼 우리는 죽이 잘 맞았다.
그러니 매일 밤 다음 날 아침을 미리 챙겨놓는 내가 아침밥을 할 짬이 없었다는 거.
아침에 일어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암만 그래도 손님인데!
이 짧은 시간 안에 한식으로 준비하기는 그렇고,
게다가 여행 왔으니 암만 다른 나라 음식에 관용적인 마음이라도 해도
아침 댓바람부터 낯선 한식이 입에 껄끄럽기도 할 거고,
토스트와 계란 한 개의 잉글리쉬 블랙퍼스트는 내가 안 땡기고,
그럼 어쩐다?
그 때 눈에 뒷베란다에서 여름의 열기를 푹푹 받고서 급격히 노쇠해가는 감자와 양파가 눈에 들어왔다.
아침으로 부담 없이 부드러운 말캉한 감자스프!
그리하여 10분 만에 만들 수 있는 감자스프를 준비하고 구운 식빵을 곁들여
우리의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식사를 나눴다.
그녀의 비행기는 내가 직장에서 점심을 먹을 즈음 떠났다.
이래 뵈도 생협에서 파는 ''쌀식빵'
여름철에는 냉장고에 오이를 썰어두고 심심할 때마다 꺼내 먹는데, 바로 그 잔재들.
감자 스프에서 가장 힘든 일은 바로 감자를 깎는 것!
나머지는 일도 아니다.
감자 3~4개를 깍아서 토막낸 후 믹서기에 간다. (감자토막사건!)
믹서기에 감자가 갈리는 사이,
냄비를 불에 달구고 버터를 큰 스푼으로 한 스푼 넣어 녹인 다음 썰어놓은 양파 반 개나 1개 정도를 볶는다.
그리고 갈아 둔 감자를 냄비에 투하하고 우유 한 컵 정도를 넣고 팔팔 끊이며 한번씩 저어준다.
소금과 후추를 뿌리면 감자 스프 끝!
말캉하고 따뜻한 감자스프를 술술 떠 먹어도 되고 바짝 구운 토스터 식빵에 찍어 먹어도 된다.
심지어 시간이 남아 바나나 쉐이크까지 했다능.
홀로 여행을 떠나는 너무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농염하게 나이 먹지도 않은,
(내가 느끼기에) 가장 좋은 나이대를 통과하는 언니들,
그녀들에게 건투를 빈다.
본 보야지! Bon Voy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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