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문제로 활발하게 이야기하는 '쓰레기없는세상을꿈꾸는방(쓰세꿈)'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
"비건퍼(가짜 합성섬유 털)이 나오는데, 이거 빨면 결국 미세플라스틱 나오는 거 아냐? '
동물성 모피인가, 합성섬유 가짜 털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두둥!
나도 이 문제를 고민한 바가 있어 예전에 썼던 합성섬유 이야기를 다시 공유한다. :)
모피에 관한 한 인간은 충분히 부끄러워해도 된다. 세계적으로 연간 5,000만 마리에 가까운 동물이 모피의 재료로 도살당한다. 여우털 코트 한 벌에는11~45마리, 토끼털 코트에는 30마리, 밍크 코트에는 55~200마리의 죽음이 필요하다. 이들은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등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육시랄’ 고통을 당한다. 어미 양을 도살하고 뱃속에 든 새끼의 피부를 벗겨내는 ‘칼라쿨(Karakul)’ 모피 앞에서 “동물에게 있어서 모든 인간은 나치다”를 반박할 어떤 변명도 찾을 수 없다. 그리하여 모피에 반대하는 모델들의 나체 시위는 패션계의 고전이 되었다.
최근 진짜 모피의 싸구려 ‘짝퉁’ 취급을 받던 인조 모피가 ‘핫하게’ 재탄생하고 있다. 없어 보이는 인조나 가짜라는 단어를 떼고 ‘비건(vegan) 패션’ ‘에코 퍼(eco fur)’ ‘하이 포 퍼(high faux fur)’ 등 간지 나는 용어로 불린다. 비건은 육고기와 생선은 물론 우유나 달걀도 먹지 않는 가장 엄격한 채식주의자를 일컫는다. 그 역시 채식주의자이자 유명한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가 비건 패션을 선보이고 진짜 모피처럼 고급스러운 인조 모피 브랜드 ‘쉬림스’(Shrimps)에 패셔니스타들이 몰려든다. 그러니까 패션계는 고루하게 들리는 정치적 올바름을 번쩍번쩍 으스대는 ‘스웨그(Swag)’ 스타일로 승화시켰던 거다. 나 역시 영화 <캐롤>에서 멋드러진 모피를 걸친 주인공에 ‘삘’ 받아 푸들처럼 갈색 털이 곱슬거리는 인조 털 코트를 장만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이 인조 털을 세탁하려고 비누칠을 하다 깨달았다. 이건 동물에서 나온 천연소재가 아니라 인간이 화석연료에서 뽑아낸 화학섬유구나, 그래서 진짜 모피와 달리 세탁소에 맡기지 않고 세탁기에 막 돌려 빨 수 있구나, 하는 사실. 플라스틱은 면 모 견 등을 넘어 이제 모피까지 대체하는 중이다. 1939년 석탄에서 뽑은 탄산과 석유에서 뽑은 아디프산(adipic acid)을 원료로 세계 최초의 화학섬유 ‘나일론’이 선보였다. 나일론은 '거미줄보다 가늘고 강철보다 질긴 기적의 실'으로 칭송받으며 스타킹으로 발매됐는데, 발매 후 불과 몇 시간 만에 400만 켤레가 팔릴 만큼 인기를 끌었다. 이에 비춰보면 지금의 비건 패션은 거들먹거리는 진짜 모피의 아우라에 짓눌려 한참이나 뒤늦게 인기를 얻은 편이다.
섬유는 크게 3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면과 마 등 식물성 섬유와 실크 모피 등 동물성 섬유를 포함하는 천연섬유다. 둘째는 폴리에스테르 나일론 아크릴 스판덱스 등 화석연료를 가공해 만든 화학섬유다. 셋째는 식물 펄프나 목화 부산물을 이용해 만든 레이온이나 모달 등의 재생섬유다. 예전에는 천연섬유가 대세였으나 석유화학산업이 발전하면서 화학섬유가 천연섬유를 압도하게 됐다. 국내 섬유 산업에서 화학섬유의 비중은 2005년 56%에서 2017년 71%로 상승해 70%를 차지한다. 네덜란드에 기반을 둔 ‘플라스틱스프재단(Plastic Soup Foundation)’ 역시 화학섬유 혹은 합성과 천연섬유가 섞인 원단이 전체 의복의 63%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우리 몸의 70%는 물로 채워져있지만, 옷 신발 가방 등 몸에 걸친 70%는 석유화학에서 뽑아낸 플라스틱이다. <<플라스틱 사회>>를 쓴 프라인켈이 말했듯 “놀라울 정도로 짧은 기간 안에 플라스틱은 현대 생활의 뼈 조직 피부가 되었다."
당장 라벨을 들여다보면 스타킹 요가팬츠 스웨터 심지어 내복과 팬티마저 얼마나 많은 옷들이 화학섬유인지 ‘현타’가 온다. 오가닉 코튼이래서 샀는데 라벨을 들여다보니 면과 화학섬유의 혼방인 경우도 있다. 그뿐이랴. 극세사 이불이나 초극세사 행주 등 기능성 제품 역시 죄다 화학섬유다. 극세사는 ‘매우 가는 실’이란 한자로, 머리카락의 1/100이나 면사의 1/30 이하 굵기의 원사를 뜻한다. 자연의 힘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만렙’의 가늘기다.
캐시미어 머플러에서 양털 보풀이, 면 티셔츠에서 면사가, 알파카 코트에서 알파카 털이 떨어져 나오듯 화학섬유에서는 화학섬유 실이 떨어져나온다. 물론 개미 콧털보다 더 가는 극세사 제품에서는 더 가늘고 미세한 화학섬유 입자가 발생한다. 화학섬유에서 나온 가늘고 긴 형태의 미세플라스틱을 미세섬유(micro fiber)라고 한다. 천연소재와 달리 화학섬유는 분해되지도 않고 자연계가 적응해본 적 없는 너무 작은 크기다. ‘플라스틱스프재단’에 따르면 폴리에스테르 자켓(플리스)에서 100만, 아크릴 스카프에서 30만, 나일론 양말에서 13만 개의 미세섬유가 나온다. 흠... 미세플라스틱 판 인해전술쯤 되려나?
세계자연보호연맹은 세계 미세플라스틱 오염의 약 35%는 화학섬유 제품을 세탁하는 과정에서 나왔을 거
라고 추산한다. ‘플로리다 미세플라스틱 캠페인'은 최근 미국 전역에서 950개의 샘플을 모아 조사한 결과 물에서 발견된 플라스틱 중 83%가 미세섬유였다고 발표했다. 실제 화학섬유 옷을 세탁하면 얼만큼의 미세섬유가 물에 풀려나올까? 국내 한 언론에 따르면 세탁기에 1.5킬로그램의 옷을 돌린 후 체에 거른 결과 0.1346그램의 미세플라스틱이 검출되었다. 우리나라 평균 세탁량에 대입해보면 의류에서만 일년에 천 톤이 넘는 미세플라스틱이 발생한다는 의미다. 크기별로는 100마이크로미터 이하가 78%로, 이는 사람이 섭취했을 때 간문맥까지 흡수될 있는 크기다.
그러나 현재 세탁기에는 개미 콧털처럼 얇디 얇은 미세섬유를 거르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국내 하수도 처리시설은 미세플라스틱을 99%정도 걸러낼 정도로 효과적이다. 그러나 단 1%의 미세플라스틱이라도 워낙 많은 양의 하수도가 바다에 흘러 들어가므로 적은 양은 아니다. 결국 미세섬유가 강을 통해 바다로 가서 크릴새우 등 먹이사슬 체계의 밑바닥부터 훑으며 부유하게 된다. 것도 무한정 오래오래. 그게 바로 천연섬유가 따라갈 수 없는 화학섬유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그 결과 북해에서 잡히는 새우의 65%에서 미세섬유가 검출되었다.
차라리 그냥 플라스틱을 퇴출시키는 것이 빠르겠다 싶다. 한데 그러면 내가 사랑하는 ‘스웩스웩’한 가짜 털 코트는 어쩌라고. 게다가 에너지 아낀다고 0도 이하에서만 보일러를 트는 우리 집에서 수면바지와 플리스 자켓 없이 버틸 자신도 없다. 화학섬유 옷은 어찌나 따습고 가볍고 싼지 화학섬유 옷 덕에 겨울을 난다. 즉, 1회용 플라스틱은 포기해도 화학섬유는 쉽게 포기가 안 된다. 모피도, 미세섬유도 다 나빠 보이는데 어쩌라고! 이럴 때 나는 내가 피해자라면 어떤 것을 택할지 생각해서 판단한다. 어차피 제대로 된 해결책(합성섬유에서 미세플라스틱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펙틴 원사 기술, 세탁기에 의무적으로 미세섬유 필터를 달도록 하는 법 등)은 아직 나와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누군가를 비판하기 전에 반드시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걸어야 한다”는 SNL의 작가 '잭 핸디'의 말을 떠올린다. 다음 생에 산 채로 피부가 벗겨지는 밍크로 태어날지 아니면 미세플라스틱을 삼키고 죽는 홍합으로 태어날지, 머리 속으로 다른 존재의 신발을 신고 1마일 쯤 걸어보았다. 오로지 두 개의 선택지밖에 없다면 나는 결단코 홍합을 선택할 거다.
하지만 1,500만 종이 존재하는 지구에 밍크와 홍합이라는 두 개의 선택지만 있으란 법 있나. 나는 홍합보다는 푸른 색 피가 흐르고 100년 넘게 산다는 랍스터로 태어나고 싶다. 뭔 소리냐면, 옷을 입는 행위로 동물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도 않고 바다에 미세플라스틱을 흩뿌리고 싶지도 않다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홍합도 밍크도 아닌, 랍스터라는 다른 선택지가 필요하다. 합리적인 가격의 다양한 재생 화학섬유 제품이 유통되는 시장, 화학섬유를 빨아도 미세섬유를 걱정할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아, 나도 모피에 반대하듯 빨개벗고 시위를 해야 하는가. 그건 좀 무리고 이미 갖고 있는 화학섬유 옷이라도 덜 입고 옷장에 쟁여둬야겠다…고 마음을 먹어 본다.
그리고 독일에서 사 온 '구피 프렌즈'라는 미세섬유를 거르는 세탁망에 합성섬유 옷을, 푸들푸들한 가짜 털 코트를, 수면 양말을 넣고 돌린다. 구피 프렌즈는 현재 해외 배송이 안 된다. 대신 알맹@망원시장에서는 '코라볼(미세섬유 거르는 세탁망)'을 7월부터 판매할 계획이다. 부디 개인이 물건을 사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아닌, 세탁기에 미세섬유 필터망 의무 설치 같은 사회적 해결책이 마련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슬기로운 의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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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https://www.plasticsoupfoundation.org/psf-in-actie/ocean-clean-wash/
http://jeju.kbs.co.kr/index.html?source=kbslocal&sname=news&stype=magazine&contents_id=371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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