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 가는 버스 안에서 조우한 환경 활동가들!
사진만 보면 꼭 한국 환경 활동가 대회 엠티(모꼬지)라도 가는 분위기죠?
아닙니다.
11월 11일 영덕에서 열렸던 <핵발전소 유치 찬반 주민투표>에 투표 사무원으로 내려가는 모습입니다.
영덕 가는 기차는 없고, 동서울에서 떠나는 버스만 있기 때문에 이렇게 딱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나는 당신이 지난 11월 한 일을 알고 있다! 두둥!!) 바리바리 싸온 고구마와 김밥을 나눠 먹으며 모꼬지 가는 여자들 마냥 그렇게 영덕으로 내려갔습니다.
투표율이 낮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밤 늦게 도착한 영덕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찬반으로 나뉘어서 붙은 천연찬란한 현수막을 보니, 부안과 삼척, 그리고 밀양에서처럼 한 동네 사람들이 갈가리 찢기고 비방하고 미워하는 처연한 상황이 보였습니다. 설령 핵발전소가 들어온다고 해도, 그리고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도 수박이 쩍 두 동가리 나듯 벌어져 버린 이 상처를 어떻게 봉합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눈 먼 돈과 욕망에 관계가 이그러지고 서로를 반목하게 만드는, 수년간 지속될 상처는 비용편익분석의 비용에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전국에서 주민투표 사무원으로 자원활동을 온 분들은 투표소 근처에서 잠을 청했는데요. 저희는 영덕 성당에서 내주신 방에서 한 15명 정도가 3개의 방에 나눠 잠을 잤습니다. 추울 거니 침낭을 싸오라는 지침에 잔뜩 쫄아있었지만, 막상 도착하니 방은 우리 집보다 더 따숩고 내일 아침을 위한 간식까지! 어떤 멘트도 없이, 너를 위한 간식이 아닌란 듯, <빵과 우유>가 급식 우유상자에 조신히 놓여있었습니다.
아주 고전적이었죠. (이 정도면 '응팔'의 정환이에 필적하는 츤데레네, 츤데레~) 다만,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방 안 가득 중독에 걸릴 정도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가득.
새벽 5시 정도에 일어나 <폭풍의 언덕>에서 남주 히스클리프가 처음 등장하는 씬처럼 거칠게 불어오는 밤바다 해안도로를 달렸습니다. 저희가 배정받은 곳은 가장 멀리 떨어진 바닷가 투표소였습니다. 시꺼먼 도로 위 움직이는 거라고는 우리밖에 없는데 주변에서는 돌비 서라운드로 바람 소리가 산군 호랑이님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어요. (BGM 엑소의 '으르렁') 새벽 밤바다의 바람소리, 참 무섭다 할 즈음, 경주환경운동연합 활동가께서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불어서 영덕에는 풍력발전이 아주 잘 된다고 하셨습니다.
무려 영덕에 있는 2만 가정 모두가 현재 영덕에서 돌아가는 24기의 풍력발전소에서 나온 전기로 자급하고 있다고 합니다! 두둥!!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덕은 신규 핵발전소 부지로 선정되어 이렇게나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전기 잡아먹는 서울, 그리고 전기 자급도 4% 정도에 그치는 서울에 산다는 자체로 우리는 지방을 착취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투표소에서 만난 자원활동가 아저씨 한 분은 은퇴하신 의사셨는데, 전국에서 영덕 주민투표 자원활동을 위해 달려온 사람들을 보니 마치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스페인 카탈루니아'에 달려온 사람들 같다고 전하셨습니다. 조지 오웰도 카탈루니아로 달려가서 파시즘에 맞서 싸우다가 부상을 당하기도 했죠. 너무 거창해졌는데, 마음만은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것에 못지 않게, 핵 마피아에 맞서 싸우는 심정으로 영덕에 내려오신 거였습니다.
아마 이 날 제가 만날 수 있는 분들 중 저와 가장 다른 분들을 가장 많이 만난 날이었을 거에요. 나이는 기본 '6학년' 이상, 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경상도 사투리, 저와는 삶의 궤적과 행로에 접점이 없어 보이는, 삶의 진국을 담고 있는 주름살이 새겨진 얼굴들. 아마 거리에서 마주쳤다면 지극히(투 머치) 보수적이라 대화가 무서워지는 어르신들께서 투표소에 들어오셨습니다. '박 정권의 승리를 위해 핵발전소를 찬성하라'는, 이게 말인지 방귀인지 분간이 안 되는 현수막이 곳곳에 붙은 보수적인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다들 지팡이를 짚거나 유모차를 지팡이 삼아 투표소까지 '떼'로 몰려오셨습니다. 주민등록증을 잊어버렸다며, 주민센터에서 새로 발급받아 오시기도 했지요. 그래서 마음이 찡, 하고 아팠습니다. 와, 이렇게 나이드신 분들이 평생 터전 잡고 살아온 곳을 핵발전소로 위험하게 하려고 하구나, 싶어서요. 저는 고향에서 살아온 시간만큼 서울에서 살아와서 그런지 고향이 딱히 특별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돈 때문에 그곳에 핵발전소가 세워진다면 단호히 반대하고 싶습니다. 갈 곳이 없어지는, 버림받은 아이 같은 기분이 든달까요. 그러니 직접 그곳에 사시는 분들은 얼마나 불안할까요.
영덕은 대게로 유명한 만큼 아주 투명했습니다.
비가 그치고 난 후 한낮에도 햇빛이 거의 없는 우중충한 날씨였는데도 바다 속 아래 바닥이 투명하게 비쳤습니다. 아마 여름철 해가 나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처럼 바다가 반짝반짝 빛나겠지요. :) 이런 곳에 핵발전소를 짓다니, 좀 거시기하지 않나요? 뭐 어딘들 후쿠시마 사고가 증명했듯 핵발전소는 좀 거시기합니다.
환경운동연합의 양이원영 처장께서는 "영덕만 지키면 한국 탈핵은 시간 문제"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삼척 찍고 영덕 찍고 풀뿌리 주민투표로 핵발전소를 전국방방곡곡에서 반대하면 정말 한국 탈핵은 시간 문제가 될 거 같아요.
정부가 세운 에너지기본계획은 미래 전력수요를 과도하게 뻥튀기하고 여기 저기 신규 원전을 짓고자 하지만, 핵발전소 지을 곳마다 우리 동네는 안 된다고 합시다. 이건 님비도 안아니고요, 그냥 "남의 눈에 피눈물이 나게 하면 내 눈에도 피눈물 난다" 이런 속담이 어울리는 시츄에이션이에요. 밀양, 삼척, 영덕 주민 피눈물 나게 하다가는 결국 핵발전소에서 나온 방사능 물질로 암에 걸리고 사고라도 나는 날에는 우리 모두 피눈물 나게 되는 거죠. 이미 세계는 핵발전소로 피눈물 나는 세계를 벗어나 정말 빠르게 신재생 에너지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핵발전소 밀집도 세계 1위! 신재생에너지는 OCED 국가 중 꼴등!! 이라는 거 알고 계시죠? 그러니 더욱 핵발전소는 안 됩니다.
추운 날씨를 뚫고 평일에 주민투표를 하러 나와주신 영덕 주민들께 감사드립니다. 당신들의 발걸음으로 저와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좀더 안전하게 지낼 수 있게 될 거라고 믿어요.
영덕 주민투표의 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영덕 핵발전소 유치 찬반 주민투표 결과를 놓고 정부는 물론 대부분의 언론이 3분의 1을 넘지 못해 주민투표법상 효력이 없다고 한다. 총유권자 대비 32.5%가 투표했기 때문에 주민투표권자 총수의 3분의 1 이상 투표라는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영덕 주민투표의 효력이 없다는 주장은 영덕 주민투표의 성과와 본질을 못보거나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영덕 주민투표에서 핵발전소 유치 반대를 한 영덕 주민은 1만274명(투표자 기준 91.7%)이었는데, 이희진 영덕군수의 당선 당시 득표수는 1만1437표(투표자 기준 45.72%)였다.
투표권자 3만4432명(9월 기준)에서 부재자 7098명을 제하면 이번 영덕 주민투표(투표자 1만1209명)의 투표율은 41%가 된다. 영덕 주민투표는 영덕에 거주하지 않는 주민들을 대상으로는 투표인명부를 작성할 수가 없기 때문에 투표율을 계산하려면 사전투표를 실시할 수 없었던 부재자를 제외하는 것이 공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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