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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희망]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아직 일러요.

by 불친절한 금자씨 2018. 3. 2.


인내심이라고는 한 줌의 방광 주머니보다 작았기에, 때때로 지하 3000미터 천연 암반수보다 더 깊이 절망했다. MB가 대통령이던 시절, 무슨 집회만 있으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날이 쨍쨍하다는 예보에 준비도 안 했는데, '호랑이 장가 가는 날'처럼 집회 장소에 비가 쏟아졌다. 저 건너의 하늘은 우리를 놀리듯 맑았다. 4대강 공사 반대한다고 남태령을 넘는 삼보일배 행진을 하는데 폭우가 쏟아져 아스팔트 고갯길에서 폭포수처럼 빗물이 쏟아져내렸다. 길바닥에 엎드려 절하는 내 곁을 스쳐가는 자동차 바퀴에서도 계곡물처럼 빗물이 튀었으니, '하늘도 울고 나도 울고' 이런 시츄에이션이었다. 

나도 서울 시장 돼서 내가 믿는 신에게 '서울을 봉헌'하면  MB님의 영롱한 '신빨'이 생길까. 그 시절 MB는 날씨마저 따라주는 '신이 내린 사람'만 같아, 이 시절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가 당선되었다. 선거 다음 날, 극장에서 '레미제라블'을 보며 훌쩍 훌쩍 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였다. 절망뿐.  박근혜 전 대통령이 두 번의 설을 감옥에서 보내고, MB의 검찰소환이 임박한 지금, 그때의 절망이 얼마나 급해 보이는지. 

고백하자면, 2014년인가 신촌에서 열린 퀴어퍼레이드 행진에서도 절망했다. 그날 몇 시간이고 길바닥에 드러누워 행진을 가로막는 기독교 혐오 세력에 지쳐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 뒷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미안했는데, 멋 낸다고 치마 입고 가서 길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자니 다리가 결리더라, 는 하나마나한 변명. 집에 돌아와 몸 편히 뒹글고 있는데 트위터에 혐오세력을 뚫고 마침내 행진을 마쳤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여전히 혐오세력은 득시글대지만, 이후 퀴어퍼레이드는 서울 시청 광장으로 옮겼고, 2017년에는 서울과 대구를 넘어 부산과 제주에서도 열리게 됐다. 퀴어퍼레이드가 계속 확장되며 열릴 수 있는 까닭은 바로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켰던 사람들 덕이다.  나는 너무 이르게 집에 왔다. 너무 쉽게 절망했다.   



레베카 솔닛의 『어둠 속의 희망: 절망의 시대에 변화를 꿈꾸는 법』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같은 종자에게는 이런 책이 필요하구나. 가없는 희망이 아니라 구체적인 희망을 기억하게 하는 책.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운동가인 수전 그리피은 이렇게 말했다.“나는 절망은 자멸적일뿐더러 비현실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충분할 만큼 많은 변화를 인생에서 겪었다.” (23쪽) 그녀의 말을 전하며, 레베카 솔닛은 이렇게 말한다. "한동안 사람들은 페미니즘이 실패했다고 선언하길 좋아했다. 페미니즘은 이제 막 시작됐고, 그것의 출현은 제1세계 도시에서뿐만 아니라 히말라야의 농촌에서도 중요성을 띠게 됐다". 이 한반도에서도 페미니즘은 리부트되는 중이다.  

그렇다. 그녀의 말처럼 귀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나는 신촌 거리에서 버텨 함께 행진을 마쳐야 했다. 사람들은 아무리 사소해도 작은 승리의 경험으로, 끝끝내 행진을 못 하더라도 길바닥에 남아 함께 버티는 누군가의 존재로 다음을 기약한다. 실로 기다리고 버티고 서로의 위로가 되어주는 것이 사회운동의 근간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이제는 수전 그리핀처럼 '절망은 비현실적'이라는 변화를 목도하며 스스로 변화하고 싶다. 중간까지라도 버티거나 남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귀가하기엔 언제나 너무 이르다. 그리고 결과를 계산해보는 것도 언제나 너무 이르다. 미국 최초의 반핵운동으로, 1963년의 제한적 핵실험 금지조약이라는 중요한 승리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한 ‘평화를 위한 여성파업’ 소속의 사람이 쓴 일화를 읽은 적이 있다. 그 조약 덕분에 지상 핵실험이 중지됐고 모유와 유아 치아에서 검출되던 방사능 낙진이 상당히 사라졌다. … 어느날 아침 비를 맞으며 케네디의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노라니 참으로 바보 같고 부질없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여성파업’ 소속의 그 여성은 말했다. 몇 년 후 그는, 가장 주목받는 반핵행동 중 한 사람이 된 벤저민 스팍 박사가 자기 삶의 전환점은 한 작은 무리의 여성들이 비를 맞으며 백악관 앞에서 시위하는 모습을 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저 여성들이 저처럼 열성적으로 매달리니, 자신도 그 문제에 대해 좀더 많이 고려해봐야겠구나, 라고 박사는 생각했던 것이다. (42쪽) 


이 분들도 비를 맞았구나. 참으로 바보 같고 부질없다는 느낌이 들었구나, 하는 깨달음.    


동쪽으로 오클라호마에 이르면, 수년간의 활동 끝에 …환경운동가들이 전세계 우라늄 생산량의 23%를 폐쇄했던 장소에 이르게 된다. 이 모든 장소는 부재의 장소, 또는 최소한 황폐화가 부재하는 장소로서, 아무것도 볼 것이 없는 수많은 장소 중 일부다. 그리고 승리는 종종 아무 볼 것도 없어 보인다. 역사의 천사는 “끔찍하다”고 말하지만, 대체역사의 천사는 “더 나쁠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두 천사 모두 옳지만, 후자는 우리에게 행동의 근거를 선사한다. (180쪽)


레베카 솔닛은 쉽게 실망하고 쉽게 냉소하고 완전체의 승리만을 바라는 '좌파'를 위해, '아무 볼 것도 없어 보이는' 승리를 기록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지나간 승리는 승리하는 순간부터 응당 그래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왕권 및 신분제 사회 철폐라던가, 노예제 폐지라던가, 여성의 참정권 획득이라던가, 우리가 당연한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들의 역사를 되짚어 가는 자체로 '어둠 속의 희망'을 보게 된다.

   

인과론은 역사가 전진한다고 가정하지만, 역사는 군대가 아니다. 그건 서둘러 옆걸음 치는 게이고, 돌을 마모시키는 부드러운 물방울이며, 수세기에 걸친 긴장 관계를 깨뜨리는 지진이다. 때로 한 사람이 어떤 운동의 영감이 되거나 한 사람의 말이 몇십 년 뒤 그리 되기도 한다. 때로 그들이 거대한 운동을 촉발하여 몇백만이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때로 그 몇백만을 똑같은 분노나 똑같은 이상이 뒤흔들면, 변화는 마치 날씨가 바뀌듯 우리를 덮친다. 이런 모든 변화의 공통점은 상상에서, 희망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42~43쪽) 

  

솔닛이 말하는 희망은 철없는 낙관도 아니고, 확신으로 가득찬 선동도 아니다. 그녀의 희망은 "과거의 복잡성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관한, 돌파구를 열어두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희망할 근거가 있다' 는 성숙한 낙관주의랄까. 그녀의 희망이 어른스럽고 현실적인 이유는“기억상실이 절망을 빚어내듯 기억은 희망을 빚어낸다”는 말처럼 기억을 딛고 서 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은 한 무리의 단편적 기억이 아니라 "전체 참여자의 다양성에 상응하는 기억, 우리의 힘까지 담아내는 기억"이다. '1987'에 여성과 노동자의 기억이 기록되어야 할 이유다. 

약 한 달 전, 참여연대에서 진행하는 김진숙 님의 강의를 들었다. 그 강의를 통해 여성과 노동자의 '1987'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26살까지 가장 되고 싶은 것이 대학생이었던, 대한민국의 최초 여성 용접공으로 당시 대공분실에 3번 끌려간 전력이 있다. 그의 기억을 타고 넥타이 부대와 대학생이 주도한 6월 항쟁 이후 7, 8, 9월 노동자 항쟁으로 들어가 '어둠 속의 희망'을 보았다. 여전히 미완성인 채 지속되어야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기억들. 1987년에 현대차와 현대 중공업이 노동자 대투쟁의  최우선 요구로 내걸었던 조항이 바로 '두발 자유화'였다. 둘째는 '조인트를 까지 마라'였다고 한다. 민주 노조의 건설이나 임금 인상, 휴가 등이 아닌 두발 자유화라니.

레베카 솔닛의 희망이 당부하는 바는 아래와 같다. 집으로 일찍 귀가하지 말 것, 악의 제거에서 멈추지 말고 선의 확립을 생각할 것, 그리기 위해서는 연약한 승리를 지속가능하게 보호하고 격려해 줄 것. 집에 돌아가고 싶은 날 내게 말해주기 위해 이 포스팅을 남긴다. 아직 귀가하기에는 좀 일러. 


집으로 돌아가는 건 연약한 승리를 아직 보호하고 격려해줄 필요가 있음에도 방치하는 것처럼 보인다.승리가 단순히 악의 제거가 아니라 선의 확립이라고 상상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고 나는 가끔 궁리해본다. 만약 미국의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 재건시대의 경제정의에 관한 약속을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집행했더라면,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이 경제정의를 제도화한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간주됐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160~161쪽)